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리케인봉 Sep 08. 2024

쌀국수와 고기만두, <벱>

벱, 성수동

얼마 전 결혼식에 다녀왔다. 신랑 신부가 서로에게 쓴 편지를 읽는 시간이 있었는데, 신랑이 연애를 하며 바뀐 자신의 입맛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요약하자면 생전 먹지도 않던 음식을 너 때문에 먹게 됐다, 앞으로 계속 함께 먹자,라는 이야기.


베트남 쌀국수를 처음 먹어본 것은 스무 살, 대학 선배가 해장에는 이게 최고라며 데려간 쌀국수 전문점이었다. 그 당시에는 베트남 쌀국수 전문점이 많지 않아서, 나는 세련된 서울의 신 문물이겠거니 하고 생각 없이 한 입 먹었다가 그 기묘한 맛에 화를 내며 젓가락을 놓았다. 이런 거 먹느니 그냥 촌놈으로 살란다! 하는 마음으로, 베트남 쌀국수가 평범한 외식 메뉴가 되고 프랜차이즈 식당이 전국에 깔릴 때까지 먹지 않았다.


아내와 연애를 시작한 것은 <멘야산다이메>의 라멘 덕분이다. 면 요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간신히 찾아서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식당을 함께 다닌 것이다. 라멘을 시작으로 막국수와 평양냉면, 우동을 지나고 나자 나는 불안해졌다. 남은 건 베트남 쌀국수뿐이었다. 그렇게 건대 앞에서 만난 어느 날, 아내가 요즘 막 뜨기 시작한 베트남 쌀국수 식당이라며 <미분당>에 데려갔고, 나는 그날 다시 태어났다. 베트남 쌀국수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으로.


어쩌면 스무 살에 갔던 한남동의 그 가게가 나와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날 나는 지독한 숙취 때문에 뭘 먹어도 맛을 못 느끼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어찌 됐든, 나는 혼자 점심을 먹을 때도 쌀국수를 찾는 사람이 됐다. 아내와 만나지 않았다면 이 맛을 모르고 살았을까? 글쎄, 우리가 만나서 뭐 먹으러 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꼭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멘과 막국수, 평양냉면, 우동을 먹는 사이에 우리는 많은 것을 나눴다.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영화와 김애란의 소설을 함께 보았고, 아내는 내가 좋아하는 홍콩 영화와 박민규의 소설을 함께 보았다. 우리는 서로 초등학생 때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가족들과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는지, 친구들과 최근에 싸운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땅따먹기를 하듯이 서로의 영역을 향해 자꾸 손을 뻗다 보니, 교집합이 생겼다. 그것은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닌, 각자의 안에 이미 있던 것들이었다. 그건 꼭 손을 맞잡는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언젠가의 겨울에 나는 열심히 ‘줄을 오래 서지 않고 꽤 맛있고 지역에서는 막 뜨기 시작한’ 쌀국숫집, 그러니까 예전에 아내가 나를 처음 데려갔을 당시의 <미분당> 같은 가게를 찾아 헤매다가, 성수동의 <벱>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완벽한 쌀국수를 만났다. 그것은 마치 그 자리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당시의 내가 자주 갔던 성수동 골목에, 그것도 찾기 쉽게 유명 식당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맨날 감자탕만 먹지 말고 이 쪽으로 와,라고 열심히 불렀겠지 나를.


이제 <미분당>은 유명 프랜차이즈가 되어 동네마다 지점이 하나씩 생길 정도로 커졌고, <벱>은 지역을 넘어 서울 전역에 이름을 알리는 식당이 됐다. 부부가 된 우리는 퇴근길에 자주 동네 쌀국숫집에 들르고, 날이 쌀쌀해지면 <벱>의 쌀국수 맛을 그리워한다. 줄을 길게 서기 때문에 쉽사리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애초에 쌀국수를 좋아하는 인간이었던 것 같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구성이다. 바지락 칼국수와 멸치국수, 공주칼국수와 고기국수를 모두 좋아하는데 베트남 쌀국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벱>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아내를 만나 라멘과 막국수, 평양냉면, 우동과 <미분당>을 거쳐 자신에게 오기를.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만나서 사랑하고, 함께 살며 퇴근길에 한 번씩 쌀국수를 먹으며 살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살다 보면, 그렇게 되도록 미리 정해진 일이 있다. 결혼을 해보니 알 것 같다. 아마 얼마 전 결혼식에서 바뀐 음식 취향을 말하던 신랑도 지금쯤 깨달았을 것이다. 애초에 이렇게 될 거였다고.

아내는 나를 만나기 전 싫어했던 고기만두를 지금은 굉장히 좋아한다. 나보다 더 먼저 냉동실에 비비고 만두를 채워 넣는 아내를 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만두 가게를 상상한다. 그 가게도 오래전부터 아내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명동 중국대사관 근처에 있지 않을까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