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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Sep 01. 2024

옛 친구에게, <이층집>

이층집 닭도리탕, 논현동

나는 취향이 보수적이고, 브랜드 충성도가 높아서 좋아하는 것이 잘 바뀌지 않는다. 한 번 마음을 주면 계속 가는 것이다. 담배도 오직 한 가지 브랜드만(예전 일이지만) 고집했고, 위스키나 운동화, 전화기도 그랬다. 좋아하는 뮤지션이나 작가도 어지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신작이 별로면 이전 작품을 꺼내보며 팬심을 유지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함께 보낸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나는 예전 이야기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모두 최소 십 년 이상 된 사람들이다. 예전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려면 함께한 시간이 최소 십 년은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릴 적 함께 뛰놀던 친구들이 취업하고 결혼해서 부모가 되는 것을 바라보면 기분이 이상하다. 나 역시 그들의 대열에 끼어 어딘가에 있을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일단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타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있다. 언제든 거리낌 없이 연락하고, 만나서 밤새 술 마시고 놀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조심스러워진 것이다. 나는 생전 처음 겪는 이 일이 굉장히 당황스럽고 또 조금 슬프다.


딱히 사이가 틀어진 것도 아닌 오랜 친구가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 또 그 과정이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 걸까? 나는 아직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성인이 되어 상경한 뒤로 지금까지, 나를 가장 편하게 해주는 친구들은 유소년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아마 함께 자란 동네를 떠난 사람으로서 의리를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나가다 보니 우리는 서로 멀어졌다. 가끔 만나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는 것이 영 어색했는지도 모르겠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십 대 때 마음 편하게 소주 한 잔 마시던 추억의 술집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대부분 다니던 대학 근처의 술집이거나 오래 산 동네에 있는 편안한 집일 텐데, 나는 영동시장 골목의 <이층집>이다. 정신없는 강남역 골목을 피해서, 다른 의미로 정신없는 한신포차 근처를 피해서, 영동시장 앞 골목에서 참 소주를 많이도 마셨다. 그 골목에서 순댓국도, 오징어회도, 삼겹살도 많이 먹었지만 가장 기억나는 곳은 <이층집>의 좁은 테라스 테이블이다.


<이층집>의 닭도리탕은 평범하지만 달지 않아 맛있었고, 사람이 언제나 적당히 있어서 뭐랄까, 소주 마시기 참 좋은 곳이었다. 좁은 테라스에서 닭도리탕 냄비를 두고 마주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으면 아래 길에서 술 취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며, 피워 올리는 담배 연기가 눈앞으로 스쳐갔다. 복잡한 술집 골목 한가운데 반쯤 떠 있는 느낌이 들고, 꼭 어릴 적 미국 영화에서 보던 숲 속의 오두막 비밀기지 안에 친구와 둘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닭도리탕이며 계란말이를 집어먹고 배가 좀 차면 교보문고 뒷골목으로 들아가 세계맥주 전문점에서 맥주를 마시거나 오뎅바에서 도쿠리를 마셨다.


나는 그곳에서 중학교 동창과 어린 시절의 추억을, 군대 동기와 군 시절의 추억을, 대학 동문과 스무 살 시절의 추억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추억이 된 그때의 시간도 과거를 추억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예전 이야기해 봐야 쓸데없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은 원래 닭도리탕 냄비를 앞에 두고 무언가를 추억하는 장소가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저런 이유로 멀어진 옛 친구들, 특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옛 친구들을 생각하면 <이층집>이 떠오른다. 아마 앞으로 그 가게를 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곳은 꽤 인기 많은 가게가 되어 이제는 줄을 서서 들어가는 곳이 됐다. <이층집>을 좋아했던 것은 왁자지껄한 사람들 한가운데 살짝 떠 있는 그 오두막 느낌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느낌은 나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다.


 이제는 만나지 않는 그 친구도 또 어디에선가 닭도리탕 냄비를 앞에 두고 예전 일을 추억하고 있을까. 아마 다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덕분에 이십 대 시절이 참 즐거웠다고, 다시 만나면 <이층집> 대신 바닥에 딱 붙어있는 널찍한 가게에서 술 한 잔 사겠다고, 나는 또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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