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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연 Oct 12. 2023

2.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입니다

어릴 때는 서서 먹는 길거리의 떡볶이집을 좋아했다. 천막 밑에 들어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서서 어묵 옆에 담긴 새하얀 물떡을 제일 먼저 집어 들었다. 어른들이 먹는 긴 꼬치는 어린아이의 짧은 팔로는 먹기 어려웠다. 잘 익은 물떡을 골라 들면 사장님이 능숙한 솜씨로 떡을 나무젓가락으로 옮겨주셨다. 푹 익어 끄트머리가 아래로 처진 물떡에 양념장을 듬뿍 발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입안에 퍼지는 짭조름한 간장 맛과 쫀득한 떡의 식감에 답지 않게 어린애처럼 실실거렸다. 나의 기억 속 가장 어린이다운 순간이었다.

천진난만한 시간은 짧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우리 가족은 해체되었고, 홀로 남매를 키우게 된 엄마의 어깨는 너무 무거워 보였다. 엄마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할 수 있게 어른스러운 아이가 되고 싶었다. 나는 엄마의 속을 썩이지 않는 애 어른으로 자랐다. 어른이 된 지금도 엄마에게는 어른스러운 딸이었다. 하지만 우울증을 겪으면서 나는 점점 고장 나고 있었다. 나는 때때로 엄마 앞에서 세상 철이 없는 딸이 되고 싶었고 엄마는 이런 나를 어려워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가다 보면 자주 일곱 살의 내가 마중을 나왔다. 


과거의 나는 시니컬하고 눈물이 없는 똑부러진 아이였다. 그래서 이유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지금의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약해진 내가 싫었고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싫었다. 그래서인지 병원 가야겠다고 결심은 했어도 선뜻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막상 병원에 갔는데 아픈 게 아니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 반, 진짜 우울증이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 반이었다. 명확하게 '당신은 아픕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원히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결국 정신과 진료 예약을 하는 데 3주가 걸렸다. 미루고 미루다 보니 달이 바뀌어 있었다. 이쯤 되니 모든 게 다 귀찮아져 아무 병원이나 갈까 싶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별로거나 사소한 거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는 가지 않을 것 같았다. 집에서 가깝고 시설은 깨끗해야 했다. 그리고 나이가 많지 않은 여자 선생님이면서 이상한 후기가 없는 병원이어야 했다. 너무 멀리 있으면 가기 귀찮을 것 같아서 버스나 도보로 20분 내외 병원으로 알아봤다. 시설도 꽤 중요한 조건이었다. 낡은 느낌이 나는 병원은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지 않았다. 남자보다는 여자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고, 나이가 너무 많은 사람은 그냥 불편해서 싫었다. 후기에 선생님에 대한 이상한 말이 있으면 편견이 생길 것 같아서 진료 후기가 좋은 곳으로 찾아봤다. 다행히 집에서 도보 20분 거리에 여자 선생님이 있는 병원이 있었다. 시설도 깔끔했고 후기도 좋았다. 무엇보다 홈페이지에서 본 선생님의 인상이 마음에 들었고 나이도 젊어 보였다.


네이버 예약으로 가까운 날짜에 예약했다. 다음 날 오전이 되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첫 진료에 대한 안내 전화였다. 초진일 때는 필요에 따라 심리 검사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발끝이 시려 왔다. 

며칠 후 처음 정신과에 발을 들였다. 화이트 그레이 톤의 깔끔한 내부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안내해 주는 간호사들도 모두 친절했다. 벽에 걸려 있는 노을 그림을 보며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대기실에는 몇 사람이 더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점점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 사람씩 이름이 불릴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지, 어떤 말을 해야 내 상태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지 계속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머리가 뒤죽박죽되었다. 생각을 그만하기로 했다. 횡설수설만 하다가 나올까 봐 불안해져 다리를 떨고 있던 찰나 이름이 불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선생님에 앉아 계셨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으니, 선생님은 어떤 이유로 왔는지 물었다. 잠을 자지 못하는 것. 최근 회사를 그만둔 것. 몸이 좋지 않아서 본가로 내려온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리고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무엇인지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우리 집은 결코 화목한 집안이 아니었다. 아침 드라마만큼 막장인 데다가 콩가루로 치면 백 포대쯤은 가뿐히 넘길 정도였다. 한 가족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을 만큼 다양한 인간상이 모여 있었고 자주 사건 사고에 휘말렸다. 부모님은 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별거를 시작했고 7년 뒤 이혼하셨다. 나와 오빠는 외가에 맡겨졌고 아빠와는 이십 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여덟 살 터울의 오빠를 친아들처럼 여겼다. 여자아이인 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냥 가족에 관심이 없었다. 이모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할머니와 이모는 머리채를 잡고 싸울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엄마는 이 집의 가장으로 이들 모두를 책임지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 

가족들은 대부분 분노에 찬 상태로 서로를 마주했고, 폭언과 폭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상처 주기 바빴다. 나는 어른들의 방관과 무관심 속에서 혼자 잘 자라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나보다 빨리 어른이 된 오빠는 취직하던 날 집을 나갔다. 이제 내게 남은 가족이라곤 엄마밖에 없었다. 

어른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이기적이었다. 엄마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모든 것을 알기를 바랐다. 어른들의 사정 같은 건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는 가끔 내가 어리다는 것을 까먹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엄마를 위해 듬직한 딸이 되었다. 나는 어린이였던 적이 한 번도 없이 어른이 되었다. 엄마를 연민했지만 한편으로는 원망했고,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했지만 미워도 했다. 


"어린 시절에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네요. 항상 가족이 힘들었어요. 어린 저에게 제 가족은 감당하기 벅찬 사람들이었죠."


오랫동안 가족에게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던 말을 겨우 내뱉었다. 그렇게 이어 나간 가족 이야기에 참아 왔던 눈물이 터졌다.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티슈를 손에 쥐어 주셨다. 이야기가 얼추 정리되자 선생님은 심리 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먼저 우울 척도 검사, 불안 척도 검사를 했다. 질문지에 그렇다 아니다를 고르거나, 내 상태와 가장 가까운 문장에 체크하는 설문 검사였다. 비어있는 문장의 뒤를 생각이 나는 대로 적는 문장 완성 검사도 했다. 그리고 자율 신경과 스트레스 반응을 측정하는 자율신경계 검사를 받았다. 손가락에 집게를 꽂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됐다. 검사는 금방 끝이 났다. 검사 결과를 가지고 다시 상담을 했고 중증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우울감과 불안감 모두 4단계 이상의 점수가 나왔고, 바로 약물치료를 시작해야 할 만큼 심각하다고 했다. 그저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약을 받아 나왔다.

멍하니 집을 향해 걸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당신은 지금 아픕니다, 그것도 심각한 수준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속이 시원했다. 개운했다. 걸어가는 길에 비어있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펑펑 울었다.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누가 물어보면 우울증이라서 그렇다고 해야지 하며 그냥 울었다.     


나 아파서 그런 거 맞구나. 아픈 거구나.


그동안 나조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다. 이유 없이 아팠고 종종 미친 사람처럼 울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 힘들었다. 끝내는 내가 나를 포기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나약하고 모자란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더 이상 나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더 빨리 병원에 가지 않은 나를 원망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이라도 병원을 간 나를 칭찬했다. 아주 오랜만에 내가 나를 칭찬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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