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치기 전, 나 그리고 이 공간은,
시작
이란 단어가 나에게 주는 여러 감정들이 있다. 기대 속 설렘, 막연한 압박, 한없이 귀찮은 한숨, 그리고 활력을 주는 신선한 공기. 시작은 끝이 있음을 의미하며 시련의 과정을 동반하고 그 과정을 맺으면서 오는 희열을 지닌다. 시작은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나의 의지가 반영된 선택이며 그렇기에 끝까지 해야 될 명분이고 성취를 얻기 위한 과정 속 책임감이다.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때문에 소중하지 않은 건 없다고 하지만, 세상의 관점이 아닌 나의 관점으로 생각해보자. 살면서 의미 없는 짓들, 가치 없는 것들이 많은 것에 부정문을 달 수 있는 3자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지닌 관계망들을 [거르고 벼르는] 것에 집중하며 '빼는'것에 시작의 의미를 두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지고 무엇이 내게 의미 있는 건지 구분되며 소중한 것들을 더 중요히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그러면서 사회가 만들어 놓은 24시간의 물리적 시간 속에 여유가 나를 반기며 속삭인다. "너는 이 소중한 시간을 무엇에 투자할 거야?"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고 그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더하는' 것의 시작이다.
나는
브런치 공간을 정의하는 2020년 3월 8일 일요일, 직장생활 9년 차에 접어든 30살의 광고기획자다. (쓰읍) 뭔가 밋밋한 느낌이 들어 좀 더 수식어를 붙여보자면 그들과 그들 사이, 그 어디도 끼지 못하는 정체성 혼란 ing. 직장생활 9년 차 광고기획자... 랄까?
그렇다. 이 말이 나의 모든 걸 대변해주고 있다. 사람은 사회가 주는 관습에 따라, 그리고 자신이 본 경험의 틀에 따라 익숙한 대로 상대방을 대하는 관성이 있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한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자신과 다른 이는 다르다는 그 자체로 이해하기 귀찮아하고 꺼려한다. 이 관성은 사회적 위치가 높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더 짙어진다.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으며 배척해도 자신에게 해가 될 건 없으니까.
-"나와 비슷한 또래라서 이야기가 통하네. 아 맞다! 과장님이시지..."
-"나이가 어리니까 편하게 대해야지. 아 맞다! 같은 과장이었지."
친하게 또는 편하게 대하는 건 아무렇지 않지만, 불편한 골짜기의 선을 넘으면 최소한의 존중은 받고 싶은 게 사람이다. 우리가 아무리 친해도 당신과 나는 직장에서 만나 일로 묶인 사이니까. 때로는 강하고 때로는 유하게 치환하여 이야기한다. 그 이후엔 어떻게 될까? 나의 수식어를 다시 곱씹으면 된다.
총 10번의 이직과 총 10개의 팀, 약 50명의 팀원 분들과 교류했다. 그리고 셀 수 없이 친분을 쌓은 내부 본부원 분들, CD, PD, 카피라이터, 아트디렉터, 디자이너, 개발자 분들. 여기에 거쳐 간 외부 협력사, 클라이언트 분들까지 하면 정말 많은 분들과 한 마디 이상의 대화를 나누며 관계의 경험치를 쌓았다. 이 정도면 사람이 어디까지 선할 수 있고 악할 수 있고 멍청할 수 있는지 충분히 경험했다고 생각하는데도 늘! 항상 새로운 부류의 사람이 등장하여 나의 레퍼런스를 가득 채워주고 있다. 단연컨데, 한국은 가장 완벽한 다인종 국가다.
공간
을 어떻게 꾸밀까? 무슨 이야기를 소중한 독자 분들에게 전달할까? 충분한 고민 끝에 브런치를 시작한다. 오랜만에 찾아온 '더하는' 시작에 설레어 중구난방 대주제들을 오가며 떠들기보다, 거르고 벼르는 '빼는' 시작을 곁들이고자 한다. 적어도 이 공간에 찾아오는 독자분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글의 종류가 있었으면 한다.
나에게 삶 그 자체 의미를 둔 '관계'. 이것을 공통의 관심사인 직장생활이란 주제에 담아 경험을 녹여낸 스토리텔링. 여러 소주제들이 있겠지만 이 공간의 콘셉트다.
언젠가부터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좋게 된 세상. 사람보다 기계가 더 친근해진 세상. 기본은 변한다지만 근본까지 뿌리 뽑히는 세상. 서로가 이끌기보다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세상. 때문에 보스도 없고 리더도 없는 세상. 이 기괴한 세상에서 우린 직장이란 또 다른 작은 세상 속에 갇혀 현재를 살아간다.
휴머니즘은 더 이상 불필요한 사상인가? 팀워크는 더 이상 사치에 불가한가? 책임감은 고전이 된 것일까? 배울 점이 있어도 꼰대며 요즘 놈들인가? 이상적 생각은 진전이 없다면 현실적 타협은 성취감이 있는가? 안일하게 생각하는 작은 암덩어리 하나하나가 모여 우리라는 조직을 죽여간다.
윗사람만의 책임인가? 불만은 위로만 뻗치는 건가? 아랫사람은 늘 정의로운가? 바람은 일방적인 게 정상인가? 우리 모두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괜히 말 꺼냈다가 일만 많아질까 두려워 행하지 못했던 이야기. 그러면서 평가가 안 좋아질까 연봉협상을 위해 정치를 해야 했던 우리의 이야기. 답이 없는 노답의 직장 관계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