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랑을 하면서 모든 것을 잃고 마는.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이번책은 추리소설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는 사랑이 주제였다. 사랑. 쉽게 집착으로 변질되고 집착이 자주 탈을 쓰는 그 이름. 그래서 입 밖으로 내기 싫고 듣기에도 부담되는 글자. 그리고 그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헤이스케의 모습에서 사랑이 집착이 되고, 진짜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사랑하게 되면서 비밀이 생기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면서 왜 나는 배신감이 들었을까. 나오코는 그걸로 죄책감을 덜고 싶었던 걸까.
사랑 타령 책을 읽고 좋았던 적이 드물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좋지는 않았다. 그저 집착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모습은 소름끼치게 현실적이라 남 일 같지 않아 거북스러웠고, 상대방의 행복을 바래주는 사랑을 할 때에는 비밀이 생겨버리는 이 무슨 한 순간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이야기를 끝까지 읽은 내가 대견했다. 상도 받고 이러저러한 기록에 평단의 찬사를 아낌없이 받았다니 보는 건 선택이겠지만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라면 역시 추리소설이 나은 것 같다. 진짜 사랑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잃은 헤이스케가 낯설지 않아서 더욱 그렇다.
사랑을 하면 잃는 것이 참 많다. 가볍게는 여윳돈으로 시작하여 더 나아가서는 나 자신도 잃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무엇이 좋다고 다들 사랑을 하는 걸까. 반대급부로 우리는 사랑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랑이 주는 안정감, 혼자가 아니라는 그 애매모호하지만 묘한 느낌. 그리고 우리가 마치 '무엇'이라도 된 듯한 인정욕구가 채워지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 더이상 외롭지 않고 기댈 수 있다는 환상.
헤이스케는 사랑을 하면서 가족과 안정을 얻고, 자신의 역할을 얻었으며 인정받고 그 가족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가족원의 사망을 통해 상실을 겪으며 자신의 역할에 의문을 기지게 되었고, 안정을 잃었으며 나아가 남은 가족에 완전한 사랑을 하면서 오히려 가족을 잃게되는, 그 가족에 없어도 되는 인물이 되고 만다. 이 아이러니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사랑은 결국 역할놀이다. 나는 너에게 이만큼을 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이만큼을 해 달라는 역할을 부과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역할놀이. 나이에 맞게 이만큼 만났으니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넘어가는 역할놀이. 그리고 각각 아내와 남편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가족의 안정과 안녕이 찾아오고, 역할놀이의 성공이 곧 사랑의 완성이 되고만다. 페미니즘은 이런 역할놀이의 전제부터 거절하기 때문에 남자들의 징징거림을, 그리고 역할놀이에서 안정을 찾고싶은 여성들의 반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할놀이는 말 그대로 주어진 역할만 연기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무엇을 찾아갈 필요도, 도전할 필요도, 부당한 것에 싸워서 변화시킬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다시 헤이스케의 사랑을 바라보았다. 헤이스케가 나오코를 인격적으로 동등하게 대했더라면 나오코를 더 일찍 인정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오코는 더 고통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빨리 찾아 나갔을 것이며, 헤이스케 역시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더욱 빨리 찾아나가 자신의 사랑으로 무언가를 굳이 잃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오코에 대한 묘한 배신감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헤이스케의 사랑이 진짜 사랑이고 나오코가 나쁜년! 이런 뉘앙스를 느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기존의 가족관념에서 계속 나오코와 자신을 끼워맞추며 사랑을 찾고 연기하며 역할을 찾기위해 고군분투한 시간은, 어찌보면 헤이스케가 옛날 사람이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물론 바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겠지만 서로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 뻔히 있었는데도 헤이스케는 마치... 이것만이 진짜 사랑인양 위선을 행하는 것 같았다.
이쯤되니 일본의 페미니즘의 현재가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헤이스케의 사랑만이 진짜고 나오코의 사랑은 진짜가 아니라는 결론이 아니다. 그저 역할놀이에 자신을 끼워맞추는데 익숙해진 헤이스케가 안타깝고, 그에 맞추려는 나오코의 힘겨운 버팀이 또 안타까웠다. 헤이스케의 사랑에 대단함을 부여하면서 반대급부로 나오코의 선택에는 독자들에게 묘한 배신감을 들게 만드는 교묘한 서술도 다시 생각하니 조금 치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작가가 기대한 대로 나오코에게 묘한 배신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나오코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