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티 Feb 01. 2021

그리피스 단기 알바 사가 1

실명하는 줄 알았던 썰.

그리피스 아저씨는 약속한 일자리를 주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탬워스 지인과 별 다를 바 없었지만, H 언니와 나에게 단기 알바 자리를 구해주기는 했다. 내가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아저씨를 찾아가 일을 언제 시작하냐고 쪼기도 했고 자기가 생각해도 좀 심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저씨가 꽂아준 알바는 사나흘 정도 한 육가공 공장 청소 외에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동네 청소 사업을 하시는 지인을 따라 와인 공장 청소를 하는 알바도 있었다. 그리고 내 그때까지 인생이 그렇듯, 공장 청소를 하고는 실명한 줄 알아서 절망했고, 와인 공장 청소를 하고는 몇 년 동안 와인을 먹지 않았다. 


두 청소 알바 중 먼저 한 일은 공장 청소였다. 우리 숙소와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출근을 하니 공장 다락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물론 말이 다락이지, 공장이다 보니 끝이 안 보이는 창고에 가까웠는데, 살면서 살면서 그렇게 많은 먼지는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다. 얼마나 먼지가 오랜 시간 차곡차곡 성실히 쌓였는지, 켜켜이 묵은 먼지가 균일하게 모여 마치 시커멓고 거대한 부직포처럼 보일 정도였다. 거기다 거미줄은 도처에 왜 이렇게 많은지 온 곳에 주룩주룩 달려있었다. 


거기다 바닥에는 죽은 쥐, 바퀴벌레, 하도 오래전에 죽어서 이제는 분해되어가는 무언가의 시체 때문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사나흘 정도에 걸쳐 여기서 청소를 해야 했는데,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거라곤 하얀 일체형 작업복과 최소한의 청소 도구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작업 환경이라 온 몸을 보호할 수 있는 PPE(personal protective equipment, 개인안전장비)를 충분히 지급하고 또 우리가 요구했어야 했는데, 당시는 그런 개념도 없었고 딱히 청소라는 작업이 그렇게 위험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튼 나름 슈퍼바이저라고 우리를 다락으로 데려온 직원이 대충 작업을 설명해주고 떠나자, 우리는 일단 천장부터 손을 대기로 했다. 워낙 천장이 더러웠기 때문에 바닥부터 청소하는 게 의미가 없었다. 거미줄 걷기, 소복이 쌓인 먼저 털어내기 등 쓱싹쓱싹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고, 장장 여덟 시간 동안 청소를 한 후에 퇴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청소를 시작한 지 한 이틀째였나, 숙소에 도착하고 언제라고 할 것도 없이 눈에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거기다 눈이 어찌나 시린지 잠시도 눈을 뜰 수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역대급 먼지 구덩이 안에서 고글 같은 것도 없이 청소를 해서 인 것 같았다. 눈물이 마구 흐르기 시작하면서 혹시라도 눈에 안 보이는 먼지가 잔뜩 끼어있어서 그런 걸까 봐 수돗물로 계속 눈을 세척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두, 세 시간이 지나고 내일 일찍 다시 공장 다락으로 출근하려면 어서 자야 하는 시간이 왔다. 하지만 눈물은 도대체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에는 수돗물로 눈을 세척하는 것도 포기하고 너무 지친 나머지 숙소 거실 소파에 눈을 감고 누워버렸는데, 그때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그래, 소똥 냄새나는 호주 깡촌에서 이렇게 나는 실명하는구나...


이제까지와는 다른 수준으로 깊은 절망감을 느끼면서 집에 어떻게 가야 되나 고민하고 있는 나를 보던 H 언니도 역시 함께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당시 렌즈를 끼던 언니는 눈이 건조해서 그런 거라면 인공 눈물이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했다. 생각해보니 나름 그럴듯한 묘안이었다. 그래서 당장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소경처럼 더듬더듬 내 침대로 기어들어가 일단 잠을 청했다. 제발 내일 아침 실명만 되지 않게 해 주세요 빌면서.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는 전날 하도 눈물을 많이 흘려서 얼굴이며 눈두덩이며 복어처럼 퉁퉁 부어있었지만 눈물이 흐르는 건 확실히 덜했다. 아직 눈이 많이 시리고 눈물도 찔끔찔끔 났지만 H 언니의 인공 눈물 덕분에 출근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먼지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안경도 찾아 쓰고 출근을 했고, 눈이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갈 때쯤 공장 청소도 잘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내 이런 미련한 성격은 누굴 닮은 걸까? 왜 나는 그때 병원부터 찾아가지 않았을까? 단순히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서 적당히 대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글을 쓰고 나니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의구심이 마구 든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어린 아이나 청소년의 의사 결정 능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전두엽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서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도 이 미련 곰탱이 같은 과거 행보를 당시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았던 전두엽에 책임을 묻고 싶다. 왜 그렇게 느긋하게 발달해서 저 지경까지 상황을 몰아갔는지, 원. 


 


  


   






 

이전 16화 그리피스 도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