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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티 Feb 04. 2021

그리피스 단기 알바 사가 2

왜 아저씨는 징그러운가.

학창 시절에 사귄 친구 중 대학생이 되고 뭔가 활동적인 동아리가 하고 싶었는지 스킨 스쿠버 동아리에 가입했던 친구가 있다. 그리고 동아리 활동 중 제주도에 가 스킨 스쿠버를 즐길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동아리 회원들이 묵은 숙소는 중년 아저씨가 홀로 운영하는 민박 집이었다. 워낙 성격이 사근사근했던 친구는 역시 아저씨에게도 다름없는 친절을 베풀었는데 거의 마지막 날쯤이었나 보다. 어쩌다 보니 아저씨와 단 둘이 아침을 먹게 되었고 아침을 먹는 중 아저씨는 뜬금없이 여기 제주도에 남아 함께 살면 어떻겠느냐라고 고백을 했다.


당시에 이 얘기를 전해 듣고는 당사자도 아닌 내가 온몸에 닭살이 돋고 불쾌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는 조심스럽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한 여성이라면 사실 한두 번쯤은 경험했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연애 감정이 전혀 안 느껴지는, 거의 띠동갑쯤 되는 남성이 추파를 던진다던가 하는 일 말이다. 그리고 나도 그리피스에서 두 번째로 한 단기 알바를 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실명 위기를 극복하고 백패커 주인아저씨가 다시 꽂아준 일은 동네에 작게 청소업을 하시는 아저씨 보조 일이었다. 그리피스는 워낙 포도 산지로 유명하기 때문에 주변에 와인 공장도 많았는데, 아저씨도 와인 공장과 공장에 딸린 사무소를 주로 청소하러 다니셨다. 나와 H 언니는 사이좋게 번갈아 가며 일을 다녔고 급여는 시급 14불씩 현금으로 따박따박 주셨다. 


함께 일하는 아저씨는 한 40대 중반쯤 되는 아저씨였는데 머리는 살짝 곱슬기가 있어 바람에 휘날리는 스타일이었고 까만 머리에 흰머리가 드문드문 나 뭔가 슈나우저를 닮은 인상이었다. 그리고 아저씨 밴에 타면 항상 How are you? 이렇게 인사를 하셨는데, 호주 억양과 본인 억양이 섞여 꼭 How wa wee? 이렇게 들리는 게 특징이었다. 그런데 성격이 모난 곳이 있는 나로써는 꼭 귀여운 척하는 것처럼 들려서 처음 인사할 때부터 이 부분이 상당히 거슬렸다. 나이도 지긋하고 흰머리도 난 아저씨가 "안농? 뿌잉뿌잉!" 하는 것처럼 들렸달까.


아무튼 뭔가 기분 나쁜 인사를 받고 나서 아저씨 밴을 타고 한 십 분에서 이십 분쯤 가면 청소할 와인 공장에 도착하곤 했다. 그리고 아저씨의 주책과 별개로 사실 와인 공장 때문에 받은 충격도 상당히 컸다. 바로 위생 때문이었는데 와인 공장에서 가장 골머리 썩는 문제인 쥐 때문이었다. 공장 내부는 물론이고 사무실에도 쥐가 들끓었는데, 구석이란 구석은 모두 작은 감옥처럼 생긴 쥐덫이 있었고 당연히 몇 마리 잡혀있었다. 거기다 똥오줌이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지, 사무실 바닥을 쓸면 까만 똥이 한가득 나왔고 마대자루로 청소하고 걸레를 빨 때면 누런 물이 나왔다. 


거기다 내가 보기에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책 없이 방치되어 있는 와인이었다. 와인 생산하는 방식을 보니 쥐 분변이 와인에 닿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거기다 심지어 내가 그리피스에 있을 때는 겨울이라 쥐가 활동을 덜할 시기였는데, 아저씨는 활동이 활발해지는 여름에는 실제로 떼로 몰려다는 쥐를 쉽게 볼 수 있다고 했다. 와인 하면 고급스럽고 비싼 음료라는 생각이 강했던 나에게는 실로 엄청난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오랫동안 와인은 절대 사먹지 않기도 했다. 


다시 아저씨로 돌아가서, 그렇게 몇 번 함께 일을 하다 한 번은 와인 쇼케이스 장이 있는 업장으로 청소를 하러 갔다. 청소를 마칠 때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것 없는 평범한 날이었는데 아저씨가 와인 한 번 맛보지 않겠냐면 쇼케이스 장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때까지 술이란 막걸리, 맥주, 소주나 마셨지 딱히 와인은 마셔보지 못했던 나는 어서 집에나 보내주지라는 생각에도 와인 맛이 궁금해 잠자코 뒤를 따랐다.  


그리고 아저씨가 따라준 화이트 와인은 정말 근사한 맛이었다. 한국에서 부모님이 조금 따라준 레드 와인 하고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시큼털털하고 쓴 맛이 강했다면 이때 마신 와인은 마치 자몽을 한 입 크게 베어 문 듯 시원하고 상쾌했다. 하필이면 이 날 햇빛도 따스하고 선선한 가을 날씨였어서 비록 쥐 분변이 섞인 와인이라고 해도 나름 정취에 취할 뻔했으나 다행히 아저씨가 주제넘은 짓을 해서 하루를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없었다. 


내가 와인을 조금씩 음미하며 약간 흐트러질 뻔한 찰나에 아저씨는 그 와인 쇼케이스 장 브로셔를 보여주는 척 은근슬쩍 다가와 내 팔에 본인 몸을 밀착했다. 브로셔에는 그리피스 지역 지도가 있었는데, 그 귀여운 척하는 말투로 우리가 와있는 곳은 어디고 내 숙소는 여기 있다는 둥 쓸데없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순간 너무 징그럽고 소름이 돋아서 아저씨가 하는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오직 내가 생각한 건 어떻게 이 형국을 타개할 것인가였다. 결국에는 대충 아저씨 설명이 마무리되는 것 같은 시점에 잽싸게 집에 가야겠다고 했고 다행히 별 일 없이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는 H 언니만 청소 일을 하기로 했다. 당장 백수인 마당에 한 푼이 아쉽긴 했으나, 호박이 아닌 백패커 나무 장판을 뜯어먹는 한이 있어도 주책바가지 변태와 같이 일하면서 조마조마하긴 싫었다. 그래서 언니에게 더 이상 일을 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는 앓은 이가 빠진 듯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징그러운 아재와 한번 더 만나는데 (물론 인생 전반을 돌아보면 이 둘 외에도 수두룩 빽빽이지만.) 이때는 본의 아니게 통쾌한 복수까지 감행했다. 이건 이후에 퀸즐랜드 에어로 다시 지역 이동은 했을 때 일인데, 이쯤 되면 왜 어딜 가든 징그러운 아저씨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볼 만하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아주 불쾌해서, 이런 주책이 땅 속에서 오랜 시간 푹 삭힌 묵은지 마냥 숙성된 변태성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행위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고심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외로워서이다. 내 경험상 이렇게 추근거리는 아저씨 혹은 삼춘은 대체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거나 부양가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본인이 인정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고독이라는 극한 감정으로 내면이 연약해져 있을 터, 예의상 친절이라는 작은 자극에도 크게 영향을 받아 자기도 모르게 정신 나간 짓을 하기 쉬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자제력이라는 브레이크가 부실할 때는 문제가 더 커지기 마련이고.

 

아무튼 이 일을 계기로 단기 알바도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마침 같은 숙소에 살던 대만 친구들을 통해 호주 내 큰 양계업자인 바이아다(Baiada)에서 에크 픽커(egg picker), 즉 계란 줍는 일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로 동네에 무료 구직 센터인 챈들러 맥클라우드(Chandler Macleod)로 가 구직 신청을 했고 이때까지 한 수고가 무색할 정도로 간단하게 일을 구할 수 있었다. 농장 일을 나선 지 한 달 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 사람 몫을 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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