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티 Apr 06. 2021

Only in 호주

아웃백 호주의 매력

그리피스 양계장을 생각하면 사실 무척 즐거운 추억보단 앞서 얘기한 충격적인 기억들이 먼저 생각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약 한 달간 생활이 전부 후회스럽지는 않다. 내가 정말 호주에 있구나라고 느낀 곳이 바로 그리피스 양계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일 처음으로 그런 느낌을 받은 건 양계장에서 일하다 작업장 주변에서 뛰놀던 회색 캥거루 떼를 봤을 때였다. 당시에 H 언니와 함께 배정되었던 작업장에서 분리되어 나 혼자 다른 작업장에서 일할 때였는데, 새로 배정된 곳은 모든 것이 수동이던 예전 작업장과 다르게 시설이 반자동화된 곳이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다시 반자동화된 시설에 맞춰 일을 다시 배웠는데, 잠시 숨도 돌릴 겸, 맑은 공기도 마실 겸 작업장에서 나왔더니 들판과 양계장을 나누는 철망을 넘어 티브이에서나 보던 회색 캥거루 떼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호주에 캥거루가 무지하게 많다는 얘기만 들었지 실감한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동물을 정말 좋아하는 나로서는 내 눈 앞에 마치 닿을 듯이 가까이 야생동물이 떼로 있는 광경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일을 가르쳐주던 아주머니께 너무 신기하다고 호들갑을 떨었더니, 이 광경보다 더 신기한 얘기를 해주셨다. 바로 아주머니의 애완 캥거루 얘기였다.


이야기인즉슨, 아주머니가 한 번은 버려진 아기 캥거루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캥거루를 집으로 데려와서 어느 정도 클 때까지 키우고 방생했는데, 마치 은혜 갚은 까치처럼 잊을 만하면 아주머니 집으로 다시 찾아와서 침대나 소파에 누워있기도 하고 주방에서 과일 따위를 찾아 먹기도 한다고 했다. 사실 은혜를 갚기보다는 계속해서 민폐 짓을 하는 거긴 하지만 이런 야생동물과 친화력, 혹은 공생력이 내가 정말 호주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고 이 아주머니의 동물 친화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주머니는 캥거루뿐만 아니라 닭도 어찌나 잘 다루는지, 아주머니를 특히 잘 따르는 수탉에게 티미라는 이름까지 붙여줬고, 이 수탉은 일을 하는 내내 아주머니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나는 작업장에 들어갈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놈이랑 맞짱을 떠야 하나 걱정부터 했는데, 아주머니는 이번에는 어떤 놈을 더 예뻐해 줄까 즐거워 보이셨다. 거기다 나 혼자 들어갈 때와는 다르게 닭들이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고 뭔가 보이지 않는 질서를 지키는 느낌까지 들었다. 나는 이 모습을 보면서 부러움보다는 어찌나 배신감이 들던지 아주머니에게는 들키지 않게 소리 없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렇게 양계장에서 호주 감성을 물씬 느끼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 욕심이 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같이 일하던 동료 중 나보다 두어 살 많은 호주 처자 집에 방이 하나 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H 언니와 즐거운 생활을 뒤로하고 이사를 감행하기도 했다. 사실 이 집에서는 뒤에 얘기할 이유 때문에 한 이 주 정도밖에 살지 않았고 같이 살던 호주인 하우스 메이트도 허구한 날 친구 집 등에 가버려서 결국엔 나 혼자 지내는 기간이 더 길었지만, 그 와중에도 다행히 소중한 추억을 하나 만들 수 있었다.


위에서도 썼듯이 같이 살던 J는 호주 현지 백인 아가씨로 약간 통통한 체격에 유흥을 좋아하는 듯 보였다. 그냥 같은 집에 산다 뿐이지 서로 공감대가 있거나 딱히 잘 통한다거나 하지는 않아서 일하고 오면 저녁 먹고 같이 티브이 좀 보다 서로 방에 들어가 취침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집을 비우는 경우도 굉장히 잦아서 나는 H 언니와 함께 살 때와 다르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물론 나야 워낙 고독을 즐기고 혼자도 잘 노는 편이라 어떤 면에서는 편하기도 했는데, 하루는 저녁 준비를 하더니 나를 불렀다.


평소에 저녁도 거의 따로 차려 먹었기 때문에 갑자기 왜 부르나 궁금했는데, 나와 보니 캥거루 고기 먹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시드니 슈퍼마켓에 포장되어 있는 게 너무 신기해서 한 번 사 먹어 봤는데 너무 질겨서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랬더니 본인이 굽고 있던 캥거루 고기를 주면서 먹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기대 반, 의심 반으로 한 입 먹었는데, 그때 먹은 캥거루 고기는 내가 시드니에서 구워 먹었던 고기와 같은 고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보들보들했다. 거기다 캥거루 고기 특유의 잡내도 전혀 나지 않았다. 비록 유흥을 좋아하는 젊은 처자였지만 현지인은 현지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J에 따르면 정말 차원이 다른 고기 맛을 만들어낸 비법은 고기를 아주 낮은 열에 천천히 레어에서 미디엄 레어 사이로 굽는 것이었다. 지금껏 양념불고기 굽듯 고열에 완전히 익혀서 먹은 게 화근이었던 거다. 다만 이런 J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이후로 캥거루를 사 먹지도, 먹을 일도 없어서 J의 조언을 써먹을 일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10년을 호주에서 살면서 가장 호주스러운 추억을 얻게 되어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다.


그런데 이렇게 천천히 잔잔한 그리피스 일상에 적응하고 있을 무렵, 회사에서 청천벽력 같은 공문이 내려왔다. 바로 해고 통지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워홀러를 더 이상 고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는데, H 언니는 잘리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내 작업 속도가 목표 생산량에 못 미쳐서인 건가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집게로 닭을 너무 때려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막 일한 지 한 달이 돼서 이렇게 조용히 두 달만 채우면 다시 시드니로 돌아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는데 막막하기만 했다. 거기다 이번에는 나 혼자 오롯이 이 현실을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빨리 기간만 채워서 농장 생활을 청산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했던 마음고생, 몸고생 모두 혼자 하기에는 너무 버겁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건 타이밍 좋게 시드니에서 방을 함께 썼던 L 언니가 퀸즐랜드 에어에서 한국인 중개인 아래 농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길로 언니와 연락을 해서 다시 지역 이동을 감행했고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어느새 정이 든 그리피스는 물론, 농장 삼총사 중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 해준 H 언니와도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이전 20화 케이티, 디 에그 픽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