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피스에서 에어까지 어떻게 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 어릴 때 일어난 소소한 것까지 기억해내 글로 써내리거나 수다 떨기 좋아하는 나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그 이유는 뭘까, 가만히 생각해보았는데, 아무래도 그리피스와 H 언니를 뒤로 하고 아쉽고 적적한 마음에 떠나는 그 순간을 머릿속에 깊이 새기고 싶지 않아서인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타운즈빌에 도착해서 L 언니와 한국인 농장 중개인을 만난 뒤 또 속았다는 낭패감이 더 깊이 각인되어 그 전 날 있었던 일 따위는 깡그리 잊었을 수도 있다. 분명히 내가 그리피스를 떠날 때만 해도 나는 보웬에 있는 토마토 농장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나는 에어에 있는 멜론 농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기서 어차피 저길 가나 거길 가나 농사짓는 건데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을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나도 나중에 안 사실인데, 농장을 가기로 한다면 무조건 작은 나무 열매 위주로, 공장을 가기로 한다면 최대한 작은 동물 위주로 일을 찾아야 90일 채우는 게 조금이나마 수월하다는 '국룰'이 있었다. 그리고 농장의 경우, 절대 피해야 하는 일은 씨나 모종을 심는 일이었다. 하루 종일 땡볕, 사실 말이 땡볕이지 40도는 가볍게 넘나드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더위 속에서 허리를 폴더폰처럼 완전히 접은 채 몇 시간이고 일을 해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대로 토마토 농사를 짓는 거라면 나름 중간 정도 난이도의 농장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가. 다사다난의 중간 보스쯤 되는 케이티가 아닌가. 그래서 보스의 품위에 걸맞게 나는 결국 멜론 농장에서 씨 심기를 하게 된 거다.
사실 도착해서 중개인의 얘기를 들을 때는 '또 속았군'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희희낙락 별로 개의치 않았다. 모든 고난은 겪고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그거 정말 미친 짓이었지'하며 반추하기 마련이니까. 당시에는 오랜만에 만난 L 언니와 반갑게 조우하고 또 새로운 사람, 환경에 적응할 생각에 들뜨기만 했다. 다만 그리피스는 깡촌이긴 했어도 종합 대학교도 있는 어엿한 지방 거점도시여서 사실 농촌에 산다는 느낌은 많이 받지 못했는데, 에어는 아주 생김새부터 달랐다. 에어 시내는 슈퍼마켓, 도서관, 구세군 가게, 맥도널드 정도가 다였고 우리가 사는 카라반 파크는 거기서 차로 20분은 족히 가야 할 정도로 깡촌도 깡촌도 그런 깡촌이 없는 정도였다.
거기다 어찌나 외졌는지 카라반 파크 주변은 그냥 허허벌판에 한 15분 정도 걸어가면 낚시를 할 수 있는 물가가 있었고 핸드폰도 전혀 터지지 않아 오는 전화는 아예 받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고 싶으면 핸드폰을 최대한 높이 들고 전파 바가 뜨는 곳을 찾아 헤매야 했다. 물론 나중에는 겨우 터지는 곳을 찾아 샘과는 자기 전에 매일 안부 통화를 했는데, 그에 반해 집에는 연락을 아주 소홀히 해서(자의 반, 타의 반 연락이 와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 속을 많이 썩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미국에 있는 큰 언니가 H 언니에게 페이스 북 메시지를 보내 내 안부를 묻게 되는 지경까지 갔고, 나는 그제야 집에 전화했는데 당시 아빠가 너무 걱정돼서 호주 경찰에 연락을 하려고 했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카라반 파크에 도착해서는 L 언니의 안내에 따라 웬 컨테이너 박스로 인도받았다. 앞으로 약 두 달간 살 숙소였던 것이다. 내 기억 상 처음에는 무슨 이유였는지 나 혼자 방을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L 언니는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C 언니와 방을 같이 썼다. 다행히 바로 옆 컨테이너 박스였기 때문에 일을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 잘 놀았고 다들 크게 모난 구석도 없어서 나와 C 언니가 함께 시드니로 돌아갈 때까지 잘 지냈던 기억이 난다. 다만 숙소에 경우 다들 안팎으로 슬리퍼를 신고 다녔기 때문에 바닥은 쓸어도 쓸어도 흙먼지로 가득했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그렇게 나름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에어에서 부산스러웠던 첫날이 저물어 갔다. 언니들은 내가 어느 정도 짐도 풀고 멍도 때릴 때쯤 되니 부지런히 내일 도시락 준비를 했는데, 나는 뭣도 모르면서 언니들이 하니까 덩달아 이것저것 준비했다. 물론 얼마나 농사가 고된 지 몰랐던 나의 도시락은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새벽 동이 트기도 전인 4시에 기상을 했다. 아직 밖은 깜깜한 밤이었는데 지금부터 나가서 일하지 않으면 진짜 더운 시간대인 12-3시 사이에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주섬주섬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나섰는데 농장으로 가는 밴에 타는 그 순간부터 다들 내 옷차림을 보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정말 그렇게 입으실 거예요? 긴팔 입으시는 게 좋을 텐데. (눈은 휘둥그레 해져서) 반팔에 반바지요? 거기다 농장에 도착해서 농장 관리인 할아버지와 다른 외국인 워커들, 중개인과 다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 때는 다들 내 옷차림을 보면서 킬킬대기까지 했다.
물론 왜 다들 그러는지는 그날 하루 작업을 하고 숙소에 돌아왔을 때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건 긴팔도 침투해 살을 태우는 호주 태양빛 때문이었고, 딱 하루 일하고 사지에 뚜렷한 경계선이 생겨버렸다. 마치 여름 내내 바닷가에서 피서한 사람처럼. 그리고 그날 이후 한 삼 일을 골골 앓았는데, 하루 종일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씨를 심다 보니 다리 뒤 쪽이 쉴 틈 없이 수축되서 건들면 톡 터질 것처럼 옹골차게 알이 뱄던 거다. 어찌나 알이 심하게 뱄던지 눕지도, 앉지도, 설 수도 없었고 거의 삼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 일주일 정도 되니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겨우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결론부터 쓰자면, 이곳 에어에서 고생은 물론 직싸게 했지만 호주 아웃백에서만 가질 수 있는 추억과 낭만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세컨드 비자도 무사히 받아서 꿈에 그리던 시드니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보니 누군가에게 이때 겪었던 얘기를 할 때면 다들 위에 언급한 추억과 낭만에 꽂히는데, 혹시라도 내 이야기에 미혹될까 내가 언제나 하는 말이 있다.
"정말 재밌었는데, 다시 가라면 절대, 죽어도,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