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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티 May 27. 2020

실망, 경악, 눈물.

나 괜히 왔구나.

직원은 나를 공항 한 구석으로 데려가면서 몇가지 질문을 했다. 티켓은 왕복으로 끊었는지 물어본 뒤 호주에서 계획을 말해달라고 해 알바도 하고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으레 워킹홀리데이를 온 사람이라면 할 말만 얘기라고 생각했고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천만에. 내 얘기를 듣던 직원의 얼굴에는 점점 의심이 깃들더니 끝내는 상관과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하면서 어떤 방 뒤로 사라졌다.


한 5분 정도 기다리며 내려다 본 공항은 여전히 부산스러웠다. 내가 기댔던 난간 아래로는 짐 찾는 곳이 훤히 보였는데 무사히 입국 심사를 마친 뒤 최종 목적지로 가는 들뜬 얼굴과 방문에 난 투명한 창 넘어 나를 주시하며 대화하는 이민성 직원들의 심각한 얼굴은 굉장한 괴리감을 주었다.


어쩌면 죄가 없는 여행객으로서 당연하지만, 결국 나는 무사히 풀려난 뒤 S가 기다리고 있는 만남의 광장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얘기인데 당시에 원정 성매매가 호주에서 이슈화 될 때였고 그래서 젊은 여성들, 특히 나 같은 단기 체류자들을 상대로 단속이 심했단다. 그래서 내 딴에는 일반화한 답변이 직원이 듣기에는 둘러대는 것으로 들렸던 거고 거기다 잠재적인 불법 체류자의 특징인 편도 티켓까지 합쳐져 합리적 의심을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보다도 더욱 뇌리에 깊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 시드니에 도착한 지 몇 분만에 봉착한 위기가 아닌, 만남의 광장으로 나오면서 감지한 땀냄새였다. 정확히 말하면 암내였는데 후각이 예민한 나로서는 상당한 충격이었는지 요즘도 나는 호주를 떠올리면 암내가 같이 연상된다. 흔히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한국 공항에 가면 마늘, 일본 공항에 가면 간장 냄새가 난다던데 이제 하나 덧붙이시라. 호주 공항에서는 암내가 난다.


그래도 위안이 됐던 것은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S였다. 이국 땅에서 수모 아닌 수모를 겪고난 직후라 그런지는 몰라도 S를 보는 순간 나는 우정을 넘어 동지애까지 느꼈고, 마닐라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미주알 고주알 떠들었는데 S는 놀라면서도 재밌게 들어주며 능숙하게 공항 전철로 나를 이끌었다.


거침없이 길잡이를 하는 S의 모습에 감탄을 하며 탄 전철은 철커덩, 철커덩 최종 목적지인 타운홀 역으로 향했다. 도중에 S는 쉐어 하우스에 대해 얘기를 꺼내면서 원래 가려고 했던 집은 무산이 되어 지금 향하는 집 가까스로 구했다고 말하며 다행히 거실에는 아무도 안 살고, 내가 사는 방에는 딱 3명 밖에 안 사는 '쾌적한' 집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거기다 운 좋게 본인은 독방으로 들어가게 되어 만족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대면한 집은 쾌적이라는 말로 나를 기대에 부풀게 한 S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호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닭장식 쉐어 하우스였는데, S가 말하는 독방은 사실 몸만 겨우 눕힐 수 있는 베란다였고 내 방은 이층 침대와 싱글 침대, 작은 책상이 억지로 구겨 넣어져 방문도 완전히 안 열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S 말마따나 거실에 사는 쉐어생이 없고 여성만 지내는 쉐어 하우스라는 점이었는데 거실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속옷을 보니 그게 그렇게 큰 장점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특히 S가 본인의 독방인 베란다 문을 드르륵 열어줄 때 도저히 실망감을 숨길 수가 없었는데, S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애써 여러 장점을 읇었다. 베란다라 환기도 아주 잘되고 햇빛도 잘 들어와 아침에는 눈이 절로 떠진다며 특 독방이기 때문에 사생활이 보호되는 것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지만, 사실 단체 생활과 S의 개인 생활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모서리가 벗겨져 너덜거리는 녹색 시트지 스티커 뿐이었다.


베란다 유리벽 넘어 보이는 풍경은 화창한 늦여름이었는데 왠지 쉐어 집에는 먹구름이 잔뜩 낀 느낌이었다. 밝은 햇빛 아래 적나라하게 보이는 S의 잡다한 소지품은 우중충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그런 분위기에 잠식되고 싶지 않아 나갈 구실을 만들기 위해 나는 S에게 핸드폰 개통을 하고 시드니 시티 구경을 시켜달라고 했다.


그런데 외국 거리 구경을 하다보면 기분 전환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착오였다. 시드니 시티, 더군다나 당시 살던 피트 스트릿은 시티 내에서도 유명한 한인 거리로 한국 음식점을 비롯, 미용실, 식료품점 등 영어를 쓰지 않아도 불편함을 못 느끼는 별천지인데 이리 봐도 한국어 간판, 저리 봐도 한국어 간판이 있는 거리를 걸으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나 시드니 괜히 왔다.


게다가 핸드폰 개통까지 한국인이 운영하는 옵터스 대리점에서 한국어로 마치고 나니 엄청난 피로감이 급격히 몰려왔다. 예상과 다른 시드니 시티 풍경에서 큰 실망을 느낀 탓이었다. 그래서 S의 계획이었던 서큘러 키 구경은 저녁으로 미룬 뒤 쉐어집으로 돌아와 삐걱거리는 이층 침대 위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저녁 느즈막이 도착한 서큘러 키는 확실히 멋졌다. 은은한 가로수 등 아래 풍경은 낮에 느낀 실망감을 보상하는 듯 했고 부끄럽지만 오페라 하우스가 시드니에 있다는 것도 사실 이 날 처음 알았다. 그렇게 한참 정취와 풍경에 취한 채 조성된 산책길을 따라 쭉 걷다가 S가 미리 봐놓은 멋들어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섰는데, 안내 받은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한 숨 돌리니 하루 종일 있었던 실망스러운 일도 별 일 아닌 수다거리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역시 사람은 마음을 놓는 그 순간 호되게 혼나는 법인가보다. 당시 레스토랑 야외석은 반지하 구조로 계단을 내려가면 벽돌로 된 벽에 둘러쌓인 형태였는데, 주문한 음식을 맛있게 즐기려던 그 때, 내 오른쪽 시야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중지만한 바퀴벌레였다. 심지어 날아다니는 종류였다. 거기에다 워낙에도 극심한 벌레 공포증이 있는 내가 소릴 지를 뻔 했음에도 침착하게 웨이터에게 얘기를 한 뒤 돌아온 것은 적반하장 식으로 야외석이니까 이해하라는 응대뿐이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선 바퀴벌레 보다도 그게 더욱 경악스러웠다.


어깨를 들썩이자리를 떠나는 백인 웨이터의 뒷모습을 보고 그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올까 고민했다. 하지만 시드니에서 첫 날인만큼 근사한 저녁을 사주겠다고 벼르던 S를 생각해 빨리 먹고 나가자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는데, 이런 갸륵한 마음가짐을 비웃듯이 이번에는 왼쪽 시야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쥐였다. 조그만한 생쥐가 아닌 고담시에서나 볼만한 정말 큰 쥐였다. 덩치에 비해 속도는 어찌나 빠르던지 쥐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주방 안으로 순식간에 사라졌. 그 순간 나는 포기했다. 아니, 그래도 잡고 있던 희망의 끈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툭 끊어졌다. 반도 채 먹지 않은 음식은 뒤로 한 채 그 길로 우리는 쉐어 집으로 돌아와 S는 베란다로, 나는 삐걱대는 침대 위로 향했다.


이미 자고 있는 다른 쉐어생들이 깨지 않게 불도 켜지 않고 최대한 조용히 침대에 비스듬이 눕자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마닐라 공항의 암울함, 이민성 직원의 눈초리, 한국인지 시드니인지 분간할 수 없는 피트 스트릿, S가 가까스로 누워있을 베란다까지.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뜨거운 것이 되어 뺨을 따라 조용히 흘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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