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부은 얼굴로 일어나니 이미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창문 밖을 보니 대도시 특유의 회색 빌딩이 눈에 먼저 들어왔지만, 그 사이로 청량해 보이는 파란 하늘이 보여 어제와는 다르게 조금이나마 희망감이 들었다. 여전히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약간 지친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왔더니 집에는 같은 방을 쓰는 셰어 생 L 언니뿐이었다.
L 언니는 명문대생으로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처음에는 꽤 무뚝뚝했다. 물론 나중에는 친해져서 맛집도 함께 가고 농장 생활도 같이 했지만, 그 날 아침은 서로 간단한 아침 인사나 건넸을 뿐 이렇다 할 대화는 하지 않았다. 괜히 귀찮게 했다가는 밉보이겠다 싶어 나는 얼른 씻고 나갈 준비를 했고, 내가 현관문을 나설 쯤에도 언니는 컴퓨터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골몰히 뭔가를 하는 L 언니를 뒤로 한 채 나는 일단 집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걸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제는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멋진 슈트 차림으로 바쁘게 걸어 다니는 현지인들, 분주하게 움직이는 카페 종업원들, 오픈 준비를 하는 이국적인 음식점들을 구경하면서 약간 들뜬 마음으로 피트 스트릿을 따라 걸었는데 설익은 기대감을 조롱하듯 나는 또다시 놀라운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맨발이지만 완벽한 슈트 차림으로 돌 담 위에서 미소를 띠고 자고 있는 남성이었다. 한 30대 중반처럼 보이는 남성이었는데 정말 멀쩡한, 오히려 말쑥한 외모로 윗옷이 약간 컸던 것 외에는 흠잡을 데 없는 슈트 차림이었다. 그런데 맨발로, 그렇다고 어디 신발을 벗어 놓은 것도 아닌 상태로 평화로운 미소까지 띠고 돌담 위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죽은 줄 알아서 놀랐고 그다음에는 옷차림 때문에 놀랐는데, 난 아직도 이 사람이 노숙자였는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다.
다시 한번 시드니는 정말 야릇한 동네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 날 목표 중 하나였던 계좌 개설을 하기 위해 ANZ 캐슬리아 스트릿 지점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월드스퀘어로 장소를 옮긴 지점이라 요즘은 지나갈 일이 있으면 세월 참 빠르다는 애늙은이 같은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ANZ 대표 색상이 파란색이라 그런지 신뢰감이 들었고, 알토란 같이 차곡차곡 쌓일 예금액을 생각하니 빨리 계좌를 열고 싶었다.
그리고 내 순서가 돼 마련된 부스로 가니 만삭에 가까운 동양계 직원이 나를 친절하게 맞아줬다. 중학교 때 학교에서 단체로 농협 계좌를 열었을 때 빼고는 스스로 계좌를 열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계좌 개설을 시작했는데, 막상 걱정할 일은 전혀 없었다. 아무래도 어린 나이에 혼자 외국에 온 게 기특해서 그랬는지 오히려 정말 고맙게도 유료 서비스인 overdraft facility까지 무료로 설정해주셨으니 말이다. 이건 쉽게 말해 마이너스 통장 서비스인데, 나의 경우 잔액이 0인 경우 오백 불까지 빌릴 수 있고 말일까지 빌린 돈을 갚으면 이자도 없다. 혹시라도 누군가 호주로 공부나 워홀을 온다면 꼭 추천하고픈 상품이다.
또, 서비스 설정을 해주시면서 원래는 돈을 내야 쓸 수 있지만 너만 특별히 공짜로 해주는 거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솔직히 그때는 호주 영어도 낯설고 용어 자체도 이해가 안 돼서 대충 그냥 좋은 거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제대로 감사하다고 말도 안 하고 은행에서 나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경우가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이 서비스가 이후에 여러 번 겪은 경제적 고비를 넘길 수 있게 해 준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때 도와준 학생이 열심히 살아남아서 아직 호주에서 잘 살고 있고 여전히 ANZ 고객이라는 것을 그 직원이 알면 어떠실까? 이제 집 사려면 대출이 필요하지 않겠냐며 영업을 하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