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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티 Jun 02. 2020

시리얼과요거트

허락된 시간은 없었다

가끔 예비 워홀러들이 인터넷에 올린 질문을 읽어보면 초기 자금에 대한 질문이 많다. 이런저런 예를 들어가며 워홀 고수들이 추천해주는 금액을 종합해보면 평균적으로 약 백에서 이백만 원 정도 가지고 오는 것 같은데, 나의 경우 딱 백만 원을 준비했다. 이 백만 원도 아르바이트하고 모은 돈과 부모님이 주신 돈을 합쳐 겨우 마련한 돈이었는데 그나마도 환전하고 나니 팔백 불 정도가 내 손 쥐어졌다.


그런데 역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해외 생활 초짜에게는 딱인 듯하다. 팔백 불이면 한 달 정도 일을 못 구해도 살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시드니 생활 물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생각할 것이다. 한 달은커녕 이주도 힘들 수 있는 금액이라는 것을.


일단 도착해서 한 가장 큰 지출은 셰어 하우스 집세였다. 호주는 일반적으로 입주할 때 한 달 집세에 해당하는 금액을 본드라고 하는 보증금으로 넣고 이주치 렌트비를 선입금한다. 다시 말해 약 주에 해당하는 집세가 한꺼번에 나가는데, 셰어 하우스는 대체로 본드에 이 주 치 렌트비를 선입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당시 주마다 내는 집세가 120불이었기 때문에 입주와 동시에 몇백 불이 그냥 나가버렸던 거다. 그나마도 다행이었던 건 나는 3명이 함께 쓰는 방이어서 집세가 싼 편이었고, 친구 S의 경우 베란다임에도 독방이었기 때문에 거금인 150불을 주마다 냈다.


이런 단체 숙소를 운영하는 이를 워홀러들은 흔히 마스터라고 부르는데, 자택을 이용해서 용돈 벌이 식으로 남는 방을 내놓는 사람도 있지만 도심으로 올수록 본인이 렌트한 집을 다시 렌트를 주고 '장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인원을 무리하게 넣어서 닭장을 만들거나 서로 갑질, 을질을 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고, 또 그렇기 때문에 셰어 하우스 내에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입주자 간 싸움이나 절도, 사기 행각 같은 크고 작은 사건이 빈번히 일어난다. 보고 들은 얘기가 많은데 하도 여러 가지라 자세한 내용은 아예 새로이 글을 쓰는 게 나을 거다.


당시 마스터는 몇 살 위 오빠였고 바람에 쓸린 것처럼 항상 머리가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몸집도 작고 쥐상이라 나는 마음속으로 쥐돌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항상 셰어 언니들의 불만과 등쌀에 쩔쩔매면서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저녁을 사기도 하는, 나쁘지만은 않은 이였다. 나나 S나 애초에 큰 기대 비교할 대상도 없었기 때문에 부딪힐 일 없이 잘살다 나왔는데, 가끔은 그 쩔쩔매는 얼굴이 기억나 아직도 웃음이 나온다.


내가 입주해서 본드와 렌트비를 받기 위해 방문했던 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언니들에게는 따로 연락 없이 와서 상당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이유는 거실에 널려진 속옷 빨래였다. 여성들만 살기 때문에 마스터가 오기 전에 연락을 해야 정리를 해놓고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 언니들의 주장이었다. 분명 젊은 여성이라면 충분히 예민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오히려 마스터가 큼하지 않기 때문에 미처 생각을 못 했거니 했다. 그래서 화낼 것까지는 없지 않나 생각했 셰어 막내니까 감히 끼어들 생각도 못하고 말씨름이 언제 끝나나 S와 눈치만 보다 마스터와 첫 번째 조우가 끝이 났다.


그렇게 뭉텅 돈이 나가고 남은 푼돈으로 각종 생필품들을 사러 나갔는데 그때 처음으로 느낀 것이 있다. 바로 자잘한 생활용품들, 손톱깎이나 머리빗 같은 것은 집에 당연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항상 집 어딘가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들도 다 내 손으로 직접 사야 했고 하나하나 모이니 액수가 꽤 됐다. 휴지, 샴푸부터 시작해 드라이기까지 사니 손은 무거워졌지만 지갑은 급히 가벼워졌고 슬슬 걱정이 됐다. 그리고 역시 나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이후로 나는 약 이 주 간 일을 구하지 못했다. 사실 어릴 때 이 년 간 미국에서 산 경험으로 영어 회화는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엄청난 착오였다. 물론 기본적으로 알아듣고 말하고는 됐지만, 호주 영어는 접해보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호주 영어는 미국 영어와 발음, 강세가 많이 다르고 자기들만 쓰는 표현도 많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해하는데 애를 먹었다.


어느 수준이었냐면 한 번은 푸드 코트 가서 샌드위치를 시켰는데, 주인아저씨가 물어보는 질문을 계속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언어 장벽에 부딪힌 사람답게 모두 예스라고 했다. 그런데 질문이 거듭될수록 아저씨 표정이 이상해졌고 그렇게 끝없는 질문 세례 끝에 받은 샌드위치는 정말로 차가운 흰 빵 안에 삶은 닭가슴살만 있는, 간도 안된 샌드위치였다. 샌드위치를 주면서 이게 맞냐고 물어보는데도 수치심에 그냥 받아서 목이 막힐 때까지 먹었다.


어떻게 보면 알량한 영어 실력으로 용감하게 호주로 왔지만 현실의 직격타를 맞은 것이었다. 또 지금 생각해보면 구직을 하는 태도도 너무 소극적이었고 분명히 영문 이력서엉망이었을 테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어찌 됐건 백수 상태로 지내는 동안 밥만 축냈으니 애초에 얼마 사놓지도 않은 식료품은 빠르게 줄었고, 약 한 주간은 제일 싸게 먹히지만 그나마 건강하게 세 끼를 시리얼 반 줌과 요구르트 몇 스푼으로 버티다 결국에는 구직에 성공했다. 그런데 그 쯤 되니 시리얼에서는 사료 냄새가, 요거트에서는 비린내가 나서 한 몇 달은 두 가지 모두 입에도 댈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시리얼이나 요거트는 사도 거의 끝까지 못 먹고 질려서 버리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이렇게 배고픈 시절에도 좋은 점은 있었다. 바로 목표와 꿈을 향하는 내 모습이었다. 그때는 배고픈 게 아니라 배가 가벼웠고 몸이 가벼우니 부지런할 수 있었다. 지금은 넉넉하진 않아도 여유가 생겨 그만큼 게을러졌는데 가끔은 빠릿빠릿했던 내가 그리울 때가 있다. 역시 옛말처럼 사람은 배고파야 발전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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