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 홀리데이를 오면서 나는 청운이 아닌 재물을 꿈꿨다. 영어 공부나 여행보다는 최대한 짧은 기간에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당시 나름 성공한 구직의 기준은 주급 천불이었는데, 사실 요즘은 최저 임금이 19불까지 올랐기 때문에 풀타임 잡 하나만 잘 잡아도 가능할 수 있는 액수다. 하지만 당시 호주 최저 임금이 약 15-6불 정도였으니 원잡으로는 힘들고 무조건 투잡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일단 계획은 아침 일찍부터 일하는 카페나 샌드위치 샵 일 하나와 오후부터 일할 수 있는 캐주얼 다이닝 레스토랑 일을 잡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시도했던 구직 방법은 한국에서 이미 작성해온 이력서를 한 열 장쯤 뽑아 들고 무작정 가게로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인터넷에서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고 여러 블로거들이 올려놨었기 때문에 한치의 의심도 없이 나도 실행에 옮겼지만 생각보다 입질이 오지 않았다. 일단 구인을 한다고 붙여놓는 가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거의 맨 땅에 헤딩 수준이었고 거기다 조금이라도 좋아 보이는 가게는 왠지 들어가기가 머쓱해 발만 동동 구르다 이력서 전달에 실패하기 일쑤였다.
결론적으로 이 방법을 이용해 나는 딱 두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다. 한 곳은 피트 스트릿에 작은 컵케익 샵이었는데, 이력서를 주고 하루, 이틀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왠지 여기만큼은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거기다 매번 지나칠 때마다 샵 유리창에 붙어있던 구인 종이도 그대로였다. 나중에는 너무 괘씸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해 다시 돌아가서 이력서를 다시 주면서 잘할 수 있으니 꼭 연락 달라고까지 했지만, 끝까지 절대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가게는 아파트에서 2분 거리에 있는 카페였다. 가깝고 현지인이 하는 카페라 기대를 가지고 이력서를 넣었는데, 트라이얼을 해보자고 해서 참 뛸 듯이 기뻤다. 여기서 트라이얼은 실제로 채용을 하기 전에 2시간 정도 일을 시켜보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법으로 정해진 시간 안에서는 무급으로 이뤄질 수 있어 악용하는 사례도 많다. 거기다 예전에는 외국인 노동자 착취가 지금보다 훨씬 심했기 때문에 거의 하루 종일, 드물게는 며칠을 무급으로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행히 이 카페 사장은 트라이얼도 시급을 계산해준다고 해, 열심히 일해서 가게에 이바지가 되는 참된 직원으로 일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호주에서 첫 출근을 했다. 사장은 내가 영어 회화가 조금 되는 것을 보고 카운터 핸드, 즉 주문받고 계산을 담당하는 직원으로 쓰려고 했다. 그래서 사장 옆에 착 붙어서 포스 쓰는 법, 주문받는 법 등을 배웠는데,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재밌는 것은 트라이얼 와중에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정말 정말 유명한 한국 배우가 까만 선글라스에 까만 티셔츠를 입고 매니저 2명과 나타나기도 했다. 일 배우느라 바쁘고 연예인에 별로 관심도 없어서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주변을 의식하며 말을 아끼는 모습이 좀 우스웠던 게 기억난다. 마치 비밀 지령을 내리듯 커피 오더를 매니저에게 내리고 사라졌는데, 거만한 듯 피곤해 보였던 모습과 요즘 화면에 비치는 소탈한 모습이 참 대조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점심시간부터 시작되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으면서 백 키친에서 일하는 태국인 직원들과 나눈 대화가 도화선이었다. 통성명 후 한 태국인 직원이 대뜸 시급이 얼마냐고 묻길래 캐시로 12불이라고 얘기를 해줬더니, 부럽다면서 자기는 9불이라고 말해줬다. 사실 12불도 나는 최저시급에 못 미치는 시급이라 내심 그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구직 기간이 길어지면서 주눅이 좀 든 상태라 마지못해 받아들였던 참이었다. 그런데 9불이라니. 거기다 같은 직원이 백인 직원은 14불이라고 덧붙였는데, 그 순간 뭔가 이 집은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부당함을 느끼고 너는 왜 9불만 받고 여기서 일하냐고 물었더니 난 영어도 못하는데 여긴 그래도 일하게 해 준다며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는 태국인 직원이 너무 가여웠다. 그래서 그 순간부터 딱 하나라도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그만둔다라는 생각으로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는데, 내가 말 그대로 깽판을 치고 뛰쳐나갈 줄은 몰랐다.
사실 일을 배우는 와중에 언뜻언뜻 사장 성미가 좀 고약하다는 것을 느꼈다. 손님에겐 친절하지만 일하는 직원이 실수라도 하면 거침없이 혼을 냈다. 그래서 실수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러다 보니 거의 끝날 때쯤 나도 상당히 예민해졌는데, 호주 화폐가 낯설다 보니 한 손님에게 거스름 돈을 더 줄 뻔했다. 그런데 그 순간 사장이, 내 손을 찰싹! 때렸다.
순식간에 정수리 끝까지 뜨거운 것이 치솟더니 몸에 있는 피가 폭주하는 기차처럼 온몸을 순환하기 시작했다.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너 지금 나 쳤냐부터 시작해서 시급 차별까지 되는 영어, 안 되는 영어 모두 동원해 따발총처럼 마구 쏘아댔다. 처음에 몇 초간 사장은 당황했는지 말을 잇지 못하다 정신을 차리고부터는 고성을 지르기 시작했고, 우리는 한 몇 분간 말싸움을 계속했다. 한참을 목청 대결을 하다 너무 화가 나서 일 안 한다고 하고 앞치마를 벗어던졌는데, 아무래도 후환이 두려웠는지 사장은 서둘러 일당부터 챙겨 나에게 내밀었다. 물론 나는 이깟 돈 필요 없다고 소리치고 그 길로 씩씩대며 집에 가버렸다.
개념이 없다면 없는 짓인데 그래도 나는 부당한 외국인 착취를 향한 항거였고 권위를 향한 의미 있는 반항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가면서 살짝 본 태국인 직원들의 상당히 꼬수워하는 얼굴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값진 전리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