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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티 Jun 10. 2020

공중 화장실 물도 식수다

나는야 물 부족 국가의 후예

앞서 말했듯이 호주에 도착하고 일을 구하기까지 이 주나 걸렸다. 물론 호주의 구직 문화를 잘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한인 사장이 운영하는 점포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아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던 것 같다. 흔히 현지인이 운영하는 점포에서 일하는 것을 오지잡(Aussie job)을 한다라고 하는데, 대체적으로 오지잡을 구하는 것은 영어실력이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의 경우 함께 온 S나 같은 셰어하우스 언니들보다 영어가 아주 조금 낫다는 어리석은 생각과 쓸데없는 자존심에 아무 일이나 일단 해야 하지 않나 따위의 약한 생각은 애써 무시를 한 것이다.


그로 인해 그 2주 간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드니 관광을 다녔다. 일을 못 잡는다는 생각에 사실 불안감이 슬슬 올라왔지만, 약해보이기 싫어 한껏 차려입고 나돌아 다녔는데 같이 살던 셰어 언니들과 S가 신기하게 바라보고 씩씩하다고 칭찬까지 하는 바람에 더욱 울며 겨자 먹기로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서큘러 키와 더 북쪽에 위치한 락스를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물론 S와 함께 첫날 오페라 하우스를 보긴 했지만 낮에도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래서 관광할 때 입으려고 산 꼬까옷을 차려입고 나섰는데, 아파트 빌딩에서 나오지 마자 만만치 않은 더위를 느꼈다. 당시로 말하자면 2월 초였고 한국으로 치면 8월 말에 해당하는 늦여름이었는데, 잠깐 동안 옷을 갈아입을까 고민했지만 역시 잘못된 선택이 더욱 매력 있는 법. 얼른 보고 오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나는 여정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아직 낯설기만 한 거리 풍경을 즐기며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왠지 서큘러 키가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분명히 길을 나서기 전 S의 컴퓨터로 확인한 결과 그리 멀지 않아 보였는데도 말이다. 거기다 호주 특유의 강한 자외선과 건조함이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입고 있던 주황색 땡땡이 플레어스커트가 햇빛 아래 더욱 쨍해 보이면서 거추장스럽기 시작했고 흰색 셔츠에는 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땡전 한 푼 없었다는 것이었다. 뭐 시원한 물을 사 먹고 싶어도 일도 못 구해서 당장 끼니도 요거트로 때우는 마당에 한낮 더위 따위에 돈을 쓸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절약을 하겠다는 마음에 있던 돈도 전부 집에 놓고 나온 상태였다. 하지만 그때 섬광 같이 든 생각이 있었다. 바로 필리핀 공항에서 미처 사용하지 못했던 필리핀화였다. 애초에 기념품 정도로 생각하고 지갑에 모셔놓고 까먹고 있었는데 요긴하게 쓰일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 이 생각을 떠올리고 나 자신에게 너무 감탄한 나머지 이렇게 기발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오지 사장들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 순간 당장 지갑에서 돈을 꺼내 눈에 보이는 환전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드니에서 대체적으로 이렇게 길가에 나있는 환전 부스는 편의점이나 작은 점포에 샵인 샵 형태로 존재한다. 입구는 거리와 맞닿아있어 거리에서 바로 환전이 가능한 구조이다. 그리고 흔히 인도인이나 기타 서남 아시안이 근무하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필리핀화를 가지고 갔던 환전소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인도인 혹은 서남 아시안 남성은 약간 상기되어 있고 머리가 헝클어져 있지만 옷차림은 말쑥한 내가 나타나자 호기심과 의아함으로 응대했다. 그리고 나는 환전한 돈으로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켤 내 모습을 상상하며 급하게 필리핀화를 내밀었다. 그런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직원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이런 적은 돈은 환전 못한다라고 문전박대를 한 것이다.


처음에는 상황이 이해가 안 가서 말을 잃었는데 그 직원은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듣는 줄 알았나 보다. 다시 천천히 또박또박 환전 못한다고 직원은 말했고, 나는 그의 심한 서남 아시안 발음에 더욱 큰 비참함을 느끼며 왜 안되냐고 대거리도 한 번 못해보고 환전소에서 멀어져야 했다. 물론 그 순간 수치심에 입이 더 바짝바짝 말라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터덜터덜 걷기 시작하면서 든 생각은 잽싸게 볼 거 보고 집에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20대 초반의 오기였던 건지 왜 그때 포기하고 집에 가지 않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거기다 서큘러키는 내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왠지 이쯤이면 도착할 법도 한대 가도 가도 도저히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계속 걷다 보니 왠지 자꾸 길이 낯익어 보였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길에 마련되어 있는 지도를 보고 다시 걸었는데 한 5분 후 나는 그 지도를 다시 보고 있었다. 완전히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길을 잃었던 거다. 뱅글뱅글 몇 번을 거리를 돌며 같은 지도로 돌아오다 보니 정신이 이상해지는 느낌이 나서 결국엔 서큘러 키는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시간은 정오를 넘은 제일 더운 시간인 데다가 길까지 잃으면서 갈증과 현기증이 최고조로 올랐다. 당장 이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던지고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 뒤 얼음을 잔뜩 넣은 콜라를 들이켜고 싶었다. 그때부터는 의지를 상실한 채로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걸었는데 어쩌다 보니 락스에서도 하버브리지 바로 아래에 위치한 동네에 다다랐다. 그쯤에서는 이미 더위에 지칠 대로 지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멋진 하버 브릿지를 즐길 여유도 없이 땀을 너무 흘려 찝찝해진 손을 씻으러 공중 화장실로 가는 도중 불현듯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화장실 물, 마실 수 있지 않을까.


화장실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나는 먼저 화장실 이용객을 파악했다. 일단 갓 들어온 사람은 없고 일을 본 뒤 나갈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인기 있는 관광지인만큼 세면대 물을 들이다 화장실로 들어오는 이에게 들킬 가능성도 농후했다. 그래서 일단 다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혼자가 되면 잽싸게 물을 마시고 아무렇지 않은 듯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기다리는데, 손도 다 씻은 마당에 나가지도 않고 불안한 듯 쭈뼛거리는 내 모습이 좀 이상해 보였나 보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에서 나간 아주머니는 질문이 많은 얼굴로 날 흘깃 보고 나갔다.


아주머니가 나가자마자 나는 얼굴을 세면대 꼭지 아래 처박았다. 최대한 물을 세게 틀어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생명수를 들이켜기 위해 나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느꼈다. 화장실 물, 나쁘지 않네.


화장실은 들어갈 때, 나갈 때 다르다고 하지 않나. 나 역시 들어갈 때는 주변이 온통 회색빛이었는데 나오니 모든 것이 제 색깔을 찾은 듯했다. 사람들의 얼굴도 더 이상 적의적이거나 심드렁해 보이지 않았다. 몇 모금의 물이 이렇게 대단하구나라는 것도 새삼 느꼈다. 거기다 그 길로 관광은 깨끗이 포기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본 환전소도 더 이상 원망스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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