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도어를 넘어 짐 검사를 하면서 뿌옇던 시야가 점차 밝아졌다. 호주 행을 결정한 뒤, 힘든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이따금 나를 불편하게 했는데, 고급스러운 면세점과 대단해 보이는 어른들의 발걸음은 이게 다 금의환향을 위한 첫 단계라는 자기 합리화를 가능케 했고, 이런 생각은 간식거리와 함께 베테랑 여행객인 양 탑승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게 했다.
당시 이용했던 항공사는 케세이 퍼시픽이었는데,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걸로 기억하지만, 그 이후로는 이용한 적이 없는 항공사이기도 하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지만 아마 구매했던 항공권이 변경이나 취소가 불가능했었고, 그래서 공항 리무진 사건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넓지 않은 레그룸 안에서 두 다리가 자리싸움을 하는 걸 보며, 몇 시간에 걸친 친절한 사육과 선잠을 견딘 후 이코노미 석 승객답게 도착한 마닐라 공항은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공항의 이미지와 정반대였다. 작고 허름했으며 무엇보다도 어두웠다. 자고로 공항이란 그 도시 혹은 국가의 랜드마크이자 최첨단 기술을 뽐내기 위한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던 나에겐 선명한 문화 충격이었는데, 사실 나에게 최고로 모욕감을 준 건 시설이 아니었다. 어리고 가난한 이방인에겐 기함을 할 정도로 비싼 음식 가격이었다.
출발하기 전 S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몇 가지 생활 용품을 나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해서 물건을 전달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소액의 필리핀 화도 답례로 함께 받았다. 부디 S를 잘 부탁하고 적은 돈이지만 맛있는 것을 사 먹으라고 하시는 아버님의 촉촉한 눈가가 헛되지 않게 꼭 마닐라 공항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사 먹겠노라 다짐까지 한 터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받은 돈의 액수는 프리미엄이 붙을 때로 붙은 마닐라 공항 물가에 비하면 참으로 정직하기 이를 때 없는 소액이었다. 공항 자체가 매우 작아서 한 바퀴 도는 데 십 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몇 바퀴를 빙빙 돌면서 내린 결론은 어두운 조명 아래, 더욱 어두운 얼굴을 한 점원이 파는 알 수 없는 음식을 사 먹기엔 이 돈에 묻은 아버님의 손 때가 너무 값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직 기내식이 체 소화되지 않았다는 점을 위로 삼아 주전부리는 아쉽지만 접기로 했는데, 이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드니에서 이 필리핀 돈은 나에게 한 번 더 모욕을 줬다.
그때 받은 돈은 이렇게 잘 모셔두고 있답니다. 지금 환율로 9,000원쯤 되네요.
요즘은 공항에 놀거리도 풍부하고 무엇보다 스마트폰, 랩탑 등의 도움으로 기다림이 옛날만큼 어렵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그때 나는 스마트폰도, 랩탑도 없는 디지털 시대 원시인이었다. 게다가 마닐라 공항의 암울한 분위기와 이국적인 간식을 즐길 기회까지 놓치면서 하마터면 시야가 또 다시 뿌옇게 될 뻔했으나, 다행히 항공사에서 호주 워킹 홀리데이 승객을 따로 모아 인솔한 결과, 한 오빠와 서로 말동무를 해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빠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고 제주도 출신으로 결혼을 앞두고 모험을 하고 싶어서 호주로 간다고 했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흔한 매리지 블루라고, 상대가 불쌍하다고 매우 놀려줄 텐데 그때는 그게 진지해 보이고 멋져 보여 나 또한 사뭇 진지하게 건투를 빌며 추억 많이 만들길 바란다고 해주었다. 다행히 호주 생활은 잘하고 돌아갔는지, 후에 올린 페이스북 포스팅에서 확인한 바로는 번듯한 남편이자 사장님이 된 모양이다.
그렇게 두런두런 얘기를 하면서 스쳐가는 인연의 대화가 그렇듯 때때로 찾아오는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보니 탑승 시간이 되어 같은 항공사 직원의 인솔을 따라 진짜 호주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고, 비행기는 이른 새벽, 브리즈번에서 한번 더 멈췄다. 브리즈번 행이었던 마닐라에서 함께 온 오빠와 몽롱한 작별 인사를 한 뒤, 기체에 기름을 채우는 항공사 직원들을 보면서 이게 호주인지 한국인지 분간하다 보니까 어느새 나는 마지막 비행을 하고 시드니에 도착해있었다.
시드니 킹스포드 공항은 인천 공항처럼 우람하고 신식이었으며 사람들도 활기차 보였다. 마닐라 공항에서 느꼈던 초조함과 당혹스러움은 뒤로 하고 마중 나온 S와 만나 대도시 특유의 종종거림을 좀 즐겨보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한 이민성 직원이 나를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