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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난 Oct 19. 2019

4. 대학에서 살아남기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지만, 2월까지 요통은 낫지 않았다. 이런 몸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을지 여러 차례 자문했다. 그래도 떠밀리듯 기간이 되어 수강신청을 했다. 진정성이 담기지 않았던 탓인지, ‘올클’에 실패했다. 실패한 수준이 아니라 시간표를 아예 새로 짜야 했다. 내 시간표는 전공 필수 수업만 남긴 채, 수정과 취소(및 교수님께 애원)를 거듭하여 B안, C안, D안… F안 즈음에 고정된다. 수강정정기간도 아닌 수강취소기간에 다다라서야.


    수강신청에는 늘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내게는 전제가 있었다. 나는 체력이 약한 정신 질환자였으며, 왕복 4시간 거리의 통학생이었다. 이것을 간과하고 수업을 고르면 두고두고 물을 먹었다. 섬유근육통 진단 전에도 한 권을 초과하는 전공 서적을 가방에 담기 힘겨웠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은 무게를 지고도, 어깨와 등이 딱딱하게 뭉쳤다. 되도록 교양은 프린트를 쓰는 수업으로 신청했고 전공서는 분철했다. 챕터 3을 강의하다가 별안간 챕터 11을 펴라고 말하는 교수님이 싫었다.


    나에게 사물함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나의 대학에서 사물함은 귀했다. 사정을 설명하자면 긴데, 간단히 말하자면 학교가 무능하고 빈곤하여 기자재가 부족했으므로 모두가 사물함을 가질 수 없었다. 전공관에 있는 사물함을 차지하려면 콘서트 티켓팅에 버금가는 사물함 신청 선착순에 들어야 했다. 19학년도 1학기에 나는 그조차 실패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많은 통학생이 그러하듯, 3~4일에 수업을 ‘몰아넣은’ 상태였다. 하루에 수업이 서너 개씩 있었다. 가방에 두세 권의 책을 갖고 다녀야 했다. 공강 날이면 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어떻게든 사물함을 구해보려 했다. 사물함 없이 학교에 다니는 건 불가능하다는 진리를, 매일 지하철에서 몸으로 깨우쳤다. 협소한 인간관계 속에서 사물함의 반의 반절이라도 빌리고자 애썼다. 전과한 동기에게 밥을 사며 사물함의 반의반이라도 빌릴 수 있겠느냐 물었다. 동기는 친절하게도 나는 기숙사생이니 사물함이 필요 없고 우리 과는 아직 신청을 받지 않았다며, 성공하면 네게 사물함을 주겠노라 했다. 뚝불을 입에 문 그가 구세주 같았다.


    그러나 친절한 동기마저 사물함을 얻는 데 실패했다. 카톡으로 소식을 전하며, 미안하댔다. 나는 괜찮다고, 고맙다고 답장하곤 찔찔 울었다. 만성 비염 때문에 감상에 취하기보다 먼저 코가 막혔다. 좆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대학의 수업은 건강한 학생이 듣는 것을 전제로 운영된다. 4번 이상 결석하면 F라는 학칙은, 3번 결석하고 2번 지각하는 것까진 괜찮습니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4번 이상 결석하면 F라는 뜻이다. 실제로 1번이라도 결석하면 출석 점수가 감점되고, 과제를 빠뜨리고,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교수님과 눈이 마주치면 이해한 표정으로 끄덕거려야 한다. 때문에 교수님은 중간고사, 나쁜 경우 기말고사에 가서야 총명해 보이던 학생이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였음을 깨닫게 된다.


    혹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깨달았지만, 구제할 여력이 없을 수도 있다. 사실 이쪽이 더 설득력 있다. 교수님은 숱한 학생을 거친 숙련된 교수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눠볼 수 있는 사람 중 가장 고지능자이며 고학력자이기도 하다. 그런 교수님이 일개 학생의 멍청함을 간파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3살짜리 아이가 과자를 먹고 싶어서 늘어놓는 거짓말이 우리 눈에 훤히 보이듯, 대학생이 늘어놓는 거짓말도 교수님 눈에는 훤히 보일 것으로 생각한다. 레포트든, 발표든, 시험이든, 모든 진실은 언젠가 들통나게 되어 있다.


    나는 섬유근육통과 정신질환을 학기 초까진 잘 숨겼다. 전공서를 분철해서 다녔으니 이목을 끌었고 (책이 무거웠을 뿐이지만), 출석도 꼬박꼬박 했고 (불면증 때문에 매번 밤을 새우고 나왔을 뿐이지만), 레포트를 성실히 작성했고 (평점평균이 너무 낮아서 불안했을 뿐이지만), 퀴즈를 매번 만점 받았다 (이건 잘했다). 교수님들은 아마도 나에게 속았다. 건강 문제와 병적인 불안 때문에 무리해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는 누구보다 건강한 학생이었다.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로 건강하기도 했다. 3월까진 주 2회 PT를 했다. 트레이너는 매번 내 허리가 돌처럼 뭉쳐있다고 말했다. 회원님, 대체 뭘 하고 오신 거예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냥 학교에 다녀왔다고 답했다. 나는 뻣뻣해서 간단한 동작도 어려워했고, 매일 녹초가 된 상태라 PT가 끝나면 휘청거리며 귀가했다. 화요일 스케줄이 특히 빡빡했다. 아침 8시에 일어나 2시간 걸려 등교한 뒤 오전 11시부터 4개 수업을 연달아 듣고 나면 저녁 7시였다. 저녁을 대충 때우고 8시 PT에 들렀다가 집에 오면 밤 10시. 다른 요일도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온다는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강 날에는 도수치료나 물리치료를 받고, 쌓이는 과제를 해결하고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학점 압박이 심해 무려 복까지(!) 했다. 과 인원이 적어서 학점 경쟁이 무척 심했다. 전공 수업에 서너 명만 A를 받을 수 있었다. 1학년 때 반수를 한답시고 놓았던 학점은 좀처럼 복구가 안 됐다. 평점평균과 취득학점과 졸업학점을 떠올리면 숨이 막혔다. 누워도 가슴이 팡팡 뛰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밤새 몸을 떨다가 해가 뜨면 오전 수업을 갔다. 무거운 가방 때문인지 몇 시간 동안 벌벌거렸기 때문인지 어깨가 아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자정이 되어 마법이 풀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아프다고 말하고 학교를 쉬었다. 자체휴강을 했다고 해서 잠이 오진 않았다. 오히려 자괴감이 들어 온몸의 근육이 아플 정도로 딱딱하게 섰다. 무단결석을 했으니 이제 다 틀렸다고 생각했다. 하루 결석을 하면 전공에서 A를 받기는 틀렸다. 내 시간표는 대개 전공수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과제를 전부 만점 받거나, 시험을 만점 받으면 혹시 몰라. 근데 어떻게 과제랑 시험을 다 만점 받지? 또, 개근도 하고 과제랑 시험까지 만점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지?터무니없는 강박이 발동했다.


    3월 중순부터 수면장애 때문에 B정신과를 다녔었다. B정신과라고 명명한 이유는, 내가 총 3개 정신과를 거쳤는데 첫째가 반수를 하던 시절 난독증 증세를 계기로 내원한 A정신과였고, 둘째가 B정신과였기 때문이다. 현재는 C정신과에 다닌다. B정신과에서 받은 약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선 부작용이 심했고, 그 때문에 약을 자주 걸렀다. 부작용을 감수하고 먹어도 불안이 가라앉지 않았다. 잠을 못 잔다고 받은 약이니 당연히 잠이 왔는데, 우습게도 아침에 학교를 못 갈까 봐 복약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이 얘기는 다음 화에 자세히 하기로 하고.


    무단결석을 한 그날, 침대에 누워 여러 죽을 방법을 고심했다. 실행 가능성 있는 계획은 없었으나 그것 말고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3월 내내, 나는 겉으로 건강해 보였고 실로 건강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죽고 싶거나, 죽어야 한다는 강박이 들거나, 자해 충동이 불쑥 고개를 치밀었다. 사소한 자극으로도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다. 사물함 신청에 실패해서, 퀴즈에서 한 문제를 틀려서, 발표하는데 교수님이 무표정해서, 동기들이 봉사활동에 다녀온 썰을 풀어서, 등등.


    하지만 이런 자해·자살 사고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 전혀! 우선 나는 내가 자살에 성공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당장 위협이 없으니 알고도 방치했다. 나는 16년도 대입 이래 우울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자신을 학대하고, 자신을 비하하고, 강박을 가지고, 피해 의식을 느끼는 데 익숙했다. 오히려 심각하게 우울할수록 마땅한 벌을 받는 거라고 여겼다. 우울하지 않으면, 감히 행복해? 따위의 생각을 하며 자신을 몰아붙였다. 이 문단에 쓰인 문장은 전부 병적인 사고에 해당한다. 알면서도 그랬다.


    정신 질환을 방치하고 방치하다 못해 무럭무럭 키운 결과, 드디어 몸이 나를 본격적으로 습격했다. C정신과 선생님은 언젠가 진료에서 이를 신체화 증상 장애라고 말한 적 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것이다. 나는 몸이, 무지막지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픈 줄도 모르고, 어쩔 바를 모를 정도로 아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고통에는 진통제가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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