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왔다. 정확히는 15년 11월부터.
이번 화는 망가진 육신이 아니라, 주로 망가진 정신에 관해 말한다. 정신이 어떻게 망가지기 시작했는지 쓸 예정이다. 섬유근육통과 관계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여러 의사의 확신 없는 설명에 의하면, 머릿속의 (나 같은 대학생은 기억할 수 없는 어려운 용어)가 어떻게 되면 일반적인 통증을 예민하게 느끼고, 그게 (나 같은 멍청한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과정)을 거쳐 심해지면 섬유근육통이 발병하는 듯하다. 다수의 섬유근육통 환자는 합병증으로 우울증과 수면장애를 앓는다. 많은 우울증 환자도 신체화 장애를 겪는다. 그 둘의 기전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는 멍청한 대학생이므로 신뢰하진 말라. 이 장구한 문단은, 섬유근육통 에세이를 쓴대서 클릭했더니 우울증 얘기를 하려고 각을 잡고 있네? 하며 페이지를 끄려는 사람을 위한 변명문이다.
글쓰기를 배울 때 받은 가르침 중 하나가, ‘독자가 무조건 다음 문단을 읽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런 수를 쓰는 데 성공했더라면 나는 아마 이 에세이를 쓸 일이 없었을 거다. 대학에 붙었을 테니까. 다행히 나는 마지막 정시 실기를 치르는 순간까지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직도 이렇게 문단을 엉망으로 나누고 있다. 만일 선생님에게 첨삭을 받았더라면 이 문단은 통째로 날아갔을 것이다. 쓸모없는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글을 잘 써도 대학에 입학하긴커녕 칭찬조차 받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따라서 보란 듯이 누구의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단, 능력 있는 누군가가 상단의 문단을 들어내고 그 외 구질구질한 문장을 전부 쳐내고 나면 이 글을 출판해주겠다고 제안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신념을 굽히고 글을 수십 차례 퇴고할 준비가 되어있다.
어쨌든, 섬유근육통을 겪는 질병기만이 궁금하다면 이번 화는 넘겨도 좋다. 오늘 내로 다음 화가 올라올 예정이다. 반대로 섬유근육통을 제외한, 나 환난이 궁금하다면 시간을 들여 이번 화를 읽어도 좋다. 의외로 재미있을지 모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잖아.
에세이는 내가 통증을 겪는 매일의 기록만을 나열해도 구저분할 것이기에, 최대한 건조하게 쓸 예정이었다. 오늘은 예정이 보기 좋게 실패할 듯하다. 별수 없다. 내 신체적 증상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다. ‘오전에 손 저림, 긴장성 두통, 골반 쑤심’. 그렇게 의무기록지처럼 점잔 떨지 않아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정도면 남 보기에 나쁘지 않다. 적어도 동정을 구걸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정신병에 관해서 말할 때 나는 언제나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이를테면 대한민국 60만 수험생이 모두 겪은 입시를 내가 가장 고난스럽게 겪은 것처럼 회상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그 정도로 내가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아직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주관적이며 상대적이라는 문장을 좋아한다. 나와 같은 엄살쟁이들을 위로하는 명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점심을 화장실에서 먹었다. 주로 삼각김밥이었다. 소리 없이 포장을 까서 먹는 게 어려웠다. 학생들은 점심을 빠르게 먹고 화장실로 돌아왔다. 세면대 앞에 죽치고 서서 고데기를 하거나 화장을 하며 한참 떠들었다. 나는 내 존재를 눈치채고 있진 않은지, 모든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루는 누군가 내가 들어 있는 화장실 문을 발로 찼다. 쾅. 여기 누구 있는 것 같은데? 신경을 곤두세우던 나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행히 비명은 참았다. 문을 열고 나가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내 얼굴을 알아내길 포기하고,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몸이 굳어갈 즈음 점심시간 끝나는 종이 울렸다.
2학기엔 견디지 못하고 전학을 갔다. 무엇을 못 견뎠느냐면, 추위를 견디지 못 했다. 전자레인지가 있는 매점은 멀었다. 아침에 산 삼각김밥의 밥알은 돌처럼 딱딱해서 이 사이에 꼈다. 화장실엔 창문이 있었는데 닫히지 않아 외풍이 심하게 들었다. 보통은 일만 보고 갈 공간이니 불평하고 그만이었지만, 나는 거기서 삼각김밥을 삼켜야 했다. 두껍게 입고 화장실에 가면 이상하게 보이니까, 얇은 카디건이나 조끼 차림으로 갔다. 교복 아래로 스미는 냉기에 떨면서 밥알을 씹던 어느 늦가을에 나는 생각했다. 전학을 가자.
전학한 학교의 화장실에는 온열기가 있었다.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틀어놓은 방처럼 따뜻했다. 심지어 몇 개의 변기는 비데라서 엉덩이도 따끈했다. 그 훈훈한 장소에서 식사할 일은, 다시는 없었다.
전학 이후로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다. 수는 많진 않아도,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부모님은 나를 걱정했고 얼마든 지원해주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고, 문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으레 문학도를 열망하는 고등학생들이 그렇듯 백일장이며 공모전에 나갔다. 입상의 경험은 짜릿했다. 전국대회에서 입상하면 상패가 학교로 배송되거든. 선생님들은 터무니없이 될 거라고들 해주었다. 공부에 취미는 없었지만, 모의고사 성적도 중간은 갔다. 나는 희망에 부풀어 자기소개서를 첨삭받았다. 그리고 모든 수시에 불합격했다.
이후의 기억은 불분명하다. 불분명한데, 아마 수능을 보기 전 합불 결과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개 학교에서 희망 고문에 가까운 예비번호 3번을 받았다. 집에서 가까운 소위 이름 있는 대학. 앞에 2명만 빠지면 열망하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앞에 2명만 죽이면 열망하던 그곳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상상이 끔찍하다는 감각도 없었다. 주변의 모두가 그런 식으로 사고하고 말했다. 다들 미쳐 있었다. 그러면서도 미친 줄을 몰랐다.
수능을 봤다. 모의고사보다 손톱만큼 못한 성적이 나왔다. 가, 나, 다군 중 다군만 안전한 학교에 수능 전형으로 접수하고 가, 나군은 실기 전형을 넣었다. 따라서 2월까지 정시 실기가 남아 있었다. 수능이 끝났어도 내내 불안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 예비번호가 빠지거나 빠지지 않거나, 대학에 붙거나 떨어지거나, 반수를 하거나 재수를 하거나, 비슷한 꿈을 수도 없이 꿨다. 횟감처럼 펄떡거리면서 깨어나곤 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미친 사람은 보통 스스로가 미친 줄 몰라서, 나는 내가 미친 줄도 모르고 실기 준비를 했다.
가, 나군까지 최종 불합격했다. 비참한 상패와 다신 들춰볼 용기가 나지 않는 포트폴리오를 안은 채 글하곤 무관한 학과에 수능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래도 다군 최초합격을 확인했을 땐 눈물이 났다. 입시 이래 처음으로 본 합격 글자였기 때문이다. 새파란 최초합격 네 글자. 눈물을 찍어내고 할머니에게 가서 A대학교에 합격했노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물었다. ‘거길 진짜 다닐 거냐?’그 이후로 들은 어떤 말도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에게도 축하받지 못했다. 대입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입학식에 가던 날, 창문을 깨고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심호흡했다. 조금 진정하고 나서는, 스크린도어가 없는 역에 내려 다음 열차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뛰어들고자 했다. 천벌을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천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죄송하고 창피해서 살아있을 수가 없었다. 입학 이후, 통학을 하며 1시간 거리의 지하철을 타는 내내 자살 사고가 들었다. 학내 상담센터에 가서 검사를 받고 우울증을 진단받았다. 상담을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바랐던 천벌이 섬유근육통으로 왔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섬유근육통이 오기 전에는 자해를 했다. 섬유근육통이 오고 난 후에도 가끔 한다. 더러는 자살 시도를 했고. 요즘은 자해를 거의 하지 않는데. 그러잖아도 충분히 아프기 때문이다. 통증에 통증을 추가할 생각은 쉽게 들지 않는다. 그런데 우습게도 근육통인지 신경통인지, 심한 통증으로 앓던 하루는 ‘왜 하필 나한테 이러느냐’고 무심코 하늘을 원망했다. 그리도 고통을 바랐으면서. 고통이 없었을 땐 직접 만들어서 고통을 겪었으면서. 실제 천벌 같은 고통이 오니까 무섭고 싫었다.
섬유근육통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니 추측할 뿐이다. 정신이 망가져서 수순대로 육신이 망가진 걸 수도 있지. 종교는 없지만, 내가 천벌을 바랐기 때문에 천벌이 내린 걸 수도 있지. 결과적으로 천벌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지금, 나는 고통이 사라지기만을 빈다.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어느 날 갑자기.
결국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천벌을 맛보기 해보니까, 그게 함부로 입에 담을 물건이 아니었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