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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난 Oct 18. 2019

2. 씨발점





    섬유근육통의 시발점始發點을 기억한다. 작년 12월,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게으름을 부린 대가로 며칠 책상에서 밤을 새웠다. 그래봤자 일주일 정도. 나는 학문에 열정을 쏟는 편이 아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 못해 바짓단이 타들어 가야 책을 들춰보는 편이었다. 그날도 습관처럼 벼락치기를 했을 뿐이다. 이따금 스트레칭을 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였을 테고, 당연히 허리가 아팠다. 그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나는 항상 허리가 아팠다.


    요통은 현대인의 질병이다. 주변만 둘러보아도 허리가 멀쩡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다들 추간판 탈출증의 위험이 있거나, 아예 추간판이 탈출했거나, 이미 수술을 했거나, 추간판에 문제가 없더라도 통증을 갖고 산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요통에 시달렸는데, 그 때문에 병원을 들렀다가 거의 자율적으로 출석하곤 했다. 복대가 없으면 등교가 힘든 날도 많았다. 체육 실기를 참가하지 못해 점수가 없을 때도 있었다. 당시의 병명은 척추관 협착증(돌이켜보면 오진인 것 같다). 병명이야 어쨌든, 그때는 진통제가 들었다. 보건실의 침대에 찜질팩을 깔고 드러눕는 게 일상이었다.


    대입 이후 정신은 빠르게 망가졌지만, 고등학교에서 12시간을 갇혀 사는 일과에서 벗어나니 몸은 회복되었다. 무리하면 요통이 찾아왔으나, 물리치료나 침을 맞고 쉬면 나아졌다. 나는 내 몸을 두고 자중하는 방법을 잘 알았다. 편한 의자를 골라서 앉았고, 얄밉게도 무거운 물건을 들지 않았고, 허리가 안 좋다는 이유로 어려운 일을 피했다. 남들에겐 꼴사납게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생존이 걸린 일이었다. 불편한 의자에 앉았다가, 무거운 물건을 덥석 들었다가, 어려운 일을 참았다가, 허리가 덜컥 상하면 며칠이고 드러누워야 했으니까. 나는 그걸 잘 알았다. 그런 식으로 아픈 허리와 몇 년을 그럭저럭 공존했다.


    그 공존이 깨진 것이 18년도 12월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고작 며칠 밤샘이 오랜 협정을 깰 정도로 무자비한 짓이었는지 의문이다. 며칠 동안, 어쩌면 마지막 하룻밤 동안 여러 번 신호를 받았다. ‘이제 그만하고 누워.’. ‘더 앉아있으면 안 돼.’. ‘그만두지 못 해?’. 나는 메시지를 전부 무시했다. 학점이 급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처럼 평생 벼락치기 할 일이 없는 계획적인 인간은 모르겠지만, 벼락치기라는 건 시간 대비 효율이 높다. 새벽에 얼마나 많은 양의 텍스트를 보았는지에 따라 당일 오전에 시험지에 써내는 텍스트의 양과 질이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나는 종강하는 날까지 허리의 신호를 무시했다. 시험은 그럭저럭 봤다. 평소에 논 것 치고는 괜찮은 성적이었고, 허리와 맞바꾼 대가라고 생각하면 아까운 성적이었다. 아니, 까놓고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더라면 그냥 책 덮고 잘 걸 그랬다. 어찌 되었든 허리는 그날을 기점으로 망가졌다. 이후로 다시는 낫지 않았다. 요통은 내 연말을 은근하게 괴롭히다가, 물리치료와 침으로 사라지지 않고 영역을 넓혀 꼬리뼈를 타고 내려왔다. 앉아있거나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차차 줄었다.





    2019년이 왔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새해를 맞고 싶었으나, 몸 상태 때문에 약속을 취소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나는 자주 미안했다. 상태가 괜찮은 날에는 운동과 봉사활동을 다녔다. 사이사이에 병원을 예약했다. 정형외과 교수님은 엑스레이 사진을 보며 말했다. 척추 뼈가 남들보다 기네요. (네?) 남들은 뼈:디스크의 비율이 3:1~4:1 정도인데 환자분은 5:1 정도예요. 추간판이 쿠션 역할을 하기 힘들겠죠. (왜… 긴 건가요?*멍청한 질문*) 그냥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겁니다. (그래서 아픈 건가요?) 그래서 아프다곤 하기 어렵지만, 통증이 오기 쉬운 허리라고는 할 수 있겠네요. 사실 환자분이라고도 하기 힘들어요. 저도 이 정도 측만증은 있거든요. 환난 씨는… 척추측만증도 없고 추간판 탈출증도 없고 척추관 협착증도 없습니다. 척추 자체는 무척 건강해요.


    (그럼 씨발 제 허리는 왜 이렇게 아픈 건가요?)


    2월에는 가고 싶은 공연이 있었다. 나는 공연장까지 갈 수 없었고, 공연까지 대기할 수도 없었고, 공연을 3시간이나 관람할 수도 없다고 판단해서 예매조차 하지 않았다. 기다리던 공연이었다. 포스터와 티저를 보고 심장이 뛰었었다. 습관적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우울증 환자가, 공연까지만 살자고 다짐할 정도로 고대하던 날이었다. 그런 공연을 스스로 포기했다. 글을 쓰는 이 시점까지도, 그 공연에 관한 어떤 영상도 찾아보지 못한다. 앞으로도 한참 찾아보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아팠는데도, 의사는 내 통증을 인정하지 않았다. 병증을 인정하기는커녕 나를 환자로조차 대하지 않았다. 엄살과 건강염려가 심한 대학생 정도로 여겼다. 마취통증의학과와 한의원에서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내 통증은 수치로 뽑히지 않았다. 사진으로 찍히지 않았다. 기계에 잡히지 않았다. 오로지 나만이, 주관적으로 느꼈다. 정형외과 의사의 가벼운 말투가 생생하다. 저도 척추가 8º는 휘었거든요? 이건 측만증으로 치지도 않아요. 운동 열심히 하시고. 수영하세요 수영. 의사에게 나는 그러마 했지만, 정말로 수영장에 들어갈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당시 나는 1:1 재활 PT를 받고 있었다. 트레이너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수영이 요통에 좋은 운동이라는 사실은 질리도록 들었지만, 나는 심한 저체중이어서 유산소 운동을 아예 안 했다. 칼로리를 최대한 섭취하고 소모하지 않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도 근육과 지방, 체중은 허무하리만치 꾸준하게 빠져나갔다. 트레이너는 근육이 척추를 잡아주면 통증이 줄어들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믿고 열심히 운동했다. 정형외과 의사의 맹목적인 ‘운동을 열심히 하세요’보다는 희망차게 들렸다.





    희망이 무섭다. 나는 늘 희망에 부풀었을 때 가장 크게 절망했다. 상투적이지만, 만성 통증에서는 언제나 통용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나아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운동을 한 뒤 통증이 더 심해졌을 때, 이번에는 반드시 들을 거라고 받아온 처방 약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켰을 때, 의료적 처치가 요원하여 방문한 병원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바닥에서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변이 없는 구덩이로 떨어졌다. 여러 번 무저갱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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