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난 Oct 18. 2019

1. 어느 여름, 섬유근육통 환자가





    매미가 울었다. 아직 서늘한 오전이었다. 내 방은 사 면 중 두 면이 창窓이다. 그 두 면이 맞닿는 모서리에 침대가 놓여 있다. 바깥의 빛과 소리가 선명하게 넘어오는 자리다. 햇살이 맑고 따뜻했다. 초여름다웠다. 그 여름의 초입다운 날에, 나는 침대의 헤드보드를 붙잡고 신음하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요통이 엄습한 탓이다. 꼬리뼈 근처에 막대기를 박아넣고 쑤시는 것처럼, 둔하고 깊은 통증이었다. 익숙하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진통제는 듣지 않았다. 아세트아미노펜, 이부프로펜, 덱시부프로펜, 울트라셋… 어떤 진통제도 통증을 없애주지 못했다. 원인은 모른다. 당시엔 병명도 몰랐다. 치료법은 여전히 모른다. 


    통증은 변모했다. 부위를 옮겨가고, 형태를 바꾸며 나와 의사를 혼란에 빠뜨렸다. 허리에서 꼬리뼈로, 꼬리뼈에서 골반으로, 골반에서 허벅지, 종아리, 발, 어깨, 목… 탈진한 마라토너의 다리처럼 근육통과 경련을 느끼다가도 돌연 대상포진 환자처럼 허벅다리가 불타는 듯한 신경통을 느꼈다. 룰렛을 돌려서 당첨 칸에 화살표가 걸리듯, 아침에 일어나면 룰렛을 돌려 무작위로 고른 것처럼 대중없는 통증이 찾아왔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모든 이상은 점진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완만한 내리막길에 굴린 돌멩이처럼, 나는 점차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 몇 달에 걸쳐,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헤드보드를 틀어쥐며 차라리 허리가 떨어져 나가기를 바랐다. 극심한 통증은 대개 하반신으로 찾아왔다. 하반신이 없으면 편해질 것 같았다. 통증 때문에 나는 울고 있었다. 울면서 빌었다. 하반신을 없애주세요. 허리에 선을 긋고 그 아래를 잘라주세요. 어떻게든 해주세요. 말했다시피, 진통제가 듣지 않아 능동적으로 통증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견뎠다. 또한 소리를 지르고 울어도 달려와 줄 사람이 없었다. 동거인인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방문을 닫으면 소리를 질러도 거의 듣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마음껏 외롭게 울 수 있었다.


    언젠가 통증에 관해 쓰게 된다면 이날의 일을 서문으로 삼아야지. 초여름이 지나고 나는 생각했다. 이유는 내가 그날 몹시 외롭게 울었기 때문이다. 매미가 시끄럽고 선선한 오전이었으며, 바람 불면 이따금 나뭇잎이 우수수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 한 겹 너머 바깥은 그렇게 평화로운데, 나는 방 안에서 홀로 앓았다. 끊어질 것 같은 허리만큼이나 마음이 괴로웠다. 엄밀히 말하면 혼자가 아닌데도, 나는 내가 혼자라고 느꼈다. 오직 질환자만이 질환자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질환자가 없었다. 할머니는 내 요통을 동정했으나 운동을 해서 빨리 ‘치료하라’고 말했다. 엄마는 내 우울함을 잘 알지만 그래도 ‘약은 줄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 외로웠다. 만성 통증을 가진 정신 질환자가 ‘죽는 날까지 죽도록’ 살아가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비슷하게 당하고, 견디는 이야기가 보고 싶었다. ‘질병기’가 보고 싶었다. 범람하는 탈출기, 회복기, 극복기, 관통기, 완치기는 필요 없었다. 다들 어찌나 잘 맞서 싸우던지. 또 어쩜 그렇게 강한지. 마음을 다잡고 살아가는지. 나는 한 차례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두세 번씩 무너지는데. 그런 약한 사람들은 다 어디에 숨어있는지.


    그래서 쓴다. 나는 섬유근육통 질환자다. 동시에 우울장애와 불안장애, 수면장애를 가졌다. 과민성 방광 증후군이 있어 약이 없으면 곤란하다. 앞서 나열한 것만큼 불편하진 않지만, 만성 비염도 있다.





    ‘픽션 에세이’라는 장르가 존재하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글쓰기를 사랑했으나, 수필을 써본 적은 없다. 수필에 관해 아는 것이라곤 형식이 자유롭다는 점과 비허구적이라는 점 두 가지. 그러나 이 에세이 앞에는 픽션이라는 말을 굳이 붙일 것이다. 이 에세이에는 허구가 섞일 것이다. 허구가 섞일 것이라는 말조차 허구일지 모른다. 비겁하게, 그렇게 한 발 글에서 물러나고 싶다.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이 글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읽게 될지 모른다. 내가 과거를 엉망으로 산 탓에 몇 사람 남지 않았는데, 그렇기에 더욱 말하고 싶다. 이건 내 경험을 글감으로 삼아 과장을 덧붙여 쓴 산문이다. 실제로 나는 이 산문만큼 아프지 않았고, 아프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저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말라는 문장만큼은 허구가 아닙니다.


    두 번째는 실용적인 이유인데.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들이 그렇듯 많은 기간의 기억이 불완전하다. 사건의 시기 따위를 정확하게 떠올릴 자신이 없다. 또한 트윗, 메모, 일기를 참고하겠지만 모든 감정을 완벽하게 복기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떤 감정은 격렬해서 쳐내야 할 것이고 어떤 감정은 담담해서 글감으로 쓰려면 달궈야 할 것이다. 그건 따지자면 허구니까. 일기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옮기지 않는 이상, 나는 거짓말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는 신상의 공개를 피하기 위해서다. 인터넷 속 불특정 다수에게 내 질병 정보를 낱낱이 알리자니 두려웠다. 학교나 수업의 이름을 숨기는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아직은 모르겠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인의 신상도 비슷하게 처리하고 싶다. 내가 특정되지 않길 바란다. 현실의 인간관계가 너무도 협소하기 때문에 별문제 없으리라는 생각은 든다. 이런 게 자의식 과잉이지.





    여름이란 계절을 좋아한다. 작년 여름에는 샌들 모양대로 발등이 그을렸었다. 이번 여름은 아팠던 기억만 있다. 얼마 전, 컵에 물을 받다가 말고 할머니에게 중얼거렸다. 아프고 나니 여름이 갔어. 할머니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내가 말했다. 아프다 보니 여름이 갔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