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독자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장르문학, 다시 말해 대중문학은 대중의 흥미에 어필하는 동시에 상업성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문학입니다. 그런데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박완규나 김중혁만 하더라도 SF나 무협 같은 ‘장르’적 요소를 차용하고 있으면서도 순수문학으로 평가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등단 작가’라는 것입니다.
“순수문학은 질문하고, 대중문학은 대답한다.”
한 프랑스 작가가 한 말입니다. 만약 그것이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에 대한 정의라 하더라도, 장르문학의 반대말이 순수문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장르적 요소’의 문법을 쓰고 있다고 해서 순수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또 장르문학을 한다고 해서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순수문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필력이 월등히 뛰어나지도 않습니다.
장르문학이 그저 ‘인터넷 소설’로만 규정되었던 시절에는 문학성이나 작문 수준이 형편없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웹소설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은 웬만한 등단 작가보다 글발이 좋은 작가들도 상당수 존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순수문학이니, 장르문학이니 구분 짓는 건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본의 경우 대중소설계의 두터운 독자층이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등등 내로라하는 장르문학의 거장들이 좋은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미국이나 영국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트와일라잇,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등등 독자를 사로잡은 건 바로 장르문학이었습니다.
외국에서는 순수문학이 출판 시장을 점령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순수문학은 말 그대로 ‘순수한 예술’을 지향하는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순수문학 독자층도 존재하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건 역시 장르문학입니다.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되는 건 문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문학화가 아닐까요? 장르문학이냐 순수문학이냐 하는 이분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좋은 소설과 좋지 않은 소설만이 있을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문장 속에 피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오. 림프액이 아니라 말이야. 그리고 그 피라는 것은 바로 심장이지. 이 심장이 뛰어야 하고, 고동쳐야 하고, 감동을 주어야 하오.
나무들이 서로 사랑하게 만들어야 하고, 화강암이 전율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야. 풀 한 포기의 이야기 속에 커다란 사랑을 집어넣을 수 있지.”
프랑스 작가 플로베르의 말입니다. 소설가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같이 호흡하는 사람이지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대중과 나란히 걷는 동반자의 역할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되려면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노선을 정하는 일보다, 대중을 끌어안고 소통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필요하다면 과학과 유머, 사랑과 역사, 철학과 스릴러 어떤 것이든 융합해야 합니다. 작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러한 방식으로 진화를 거듭해왔으니까요. 등단 여부에 얽매이지 말고, 당신이 정말로 쓰고 싶은 이야기에 ‘올인’ 하세요. 소설은 평론가가 아닌, 오직 독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글. 제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