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텝스 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한바탕 전기세 소동이 있고 난 후, 다음 날 아침은 은근히 평화로웠다. 일요일여서였을까?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마크도 테라스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오늘은 조금 여유를 보고자 마크 옆에 앉았다. 항상 글을 쓸땐 조용히 적고 싶어 방에 들어와서 적곤 한다.
여행8개월차 마크와 커피 한잔과 함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다닥, 다다다다’
태양이 바짝 쬐고있는 낮 12시의 코사무이, 우리 사이엔 대화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 키보드를 두들기며 그 사이로 하늘하늘한 바람과 새소리만이 흘러들 뿐이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들 사이로 내려쬐는 햇빛을 보니 오늘은 노트북을 닫아야만 할 것 같았다. 제대로 핑계가 생긴 셈이다. 꽃이 피면 꽃구경을 가듯, 놀 이유를 찾아버린 우리 둘은 바로 웃통을 벗어던졌다.
큼지막하게 노래를 틀어둔 뒤, 이제 필요한 건 맘껏 여유를 즐기는 일 뿐이었다.
‘풍덩’
곧이어 마크도 들어온다. 꽤나 깊은 풀장은 나의 목까지 풀이 차올랐지만, 그걸 보던 마크는 ‘스몰 아시안가이’라면서 웃곤 한다. 풀장에 들어오니 203cm의 키가 더욱 실감나게 보일 수 밖에 없다. 한창을 놀다 하늘을 쳐다보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마크, 내 친구들이 왜 태극기 걸어놨냐고 엄청 많이물어봐”, 갑자기 어제 친구와 전화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뭐라했는데?”, 웃음기를 한가득 머금고 다시 마크가 물어봤다.
“여기 스코트랜드 친구 한명이 자기나라 자부심이 너무 가득해서, 안걸어둘 수 가 없었다고, 한국이 뭔지 보여줘야만 했다고 그랬어”, 고결하고 당당함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말했다.
둘은 한참이나 키득거리며 웃으며, 나란히 걸려있는 스코트랜드와 대한민국의 국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조금 더 큰 걸 가져올 걸 그랬나보다. 하필 또 조금 작은바람에 한 소리하면 어쩌지, 걱정했지만 그저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혀니, 오늘 계획이 뭐야?”
“나?! 글도 쓰고 올렸으니깐 이제 자유야!”
“그럼 오늘 뒷산에 스쿠터 타고 올라갈래? 뷰포인트가 있대”
가고싶단 이유보단 가기 싫은 이유를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파아란 하늘에 솜뭉치 처럼 뭉쳐놓은 구름들 그리고 시원한 바닷바람,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 만 같았다.
어젯밤의 일로 사이가 소원해진 제스퍼가 딱 맞춰 도착했다. 마크와 산에 가기전 글을 업로드 하느냐 바쁜 나에게 자꾸만 이것저것 묻는다. 귀담아 듣지 않았던 까닭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느낌상 선셋보러가서 사진찍어달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벨기에의 발음은 정말 갑오브 갑이다. 호로로로롤 할머니의 개인기를 매일 매 대화마다 듣는 듯..)
눈치영어의 실력이 점점 올라가고 있는 요즘, 자연스레 못알아듣는 척을 했다. 거절의 이유를 설명하기보단 이게 더 빠를 것 같아서 말이다.
‘뭐 영어못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네’
괜히 눈치챌 새라, 마크와 나는 후다닥 오토바이를 타고 산 정상으로 향했다. 어제의 일떄문이라기 보단, 오늘은 딱히 누군가에게 터치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된 여유에 제스퍼 빠뜨리기. 그게 딱 나의 심정이었다.
‘부우우웅, 부아아앙’
오토바이의 공회전 소리가 양쪽 귀를 가득 채운다. 산 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정말 쉽지않았다. 심지어 차를 타고 지나가던 현지인 아저씨가 창문을 열고 한마디 하셨다. “배드 로드”
'알아요…, 아저씨 근데 이미 절반을 와버렸는 걸요'
이 길을 내려간다니 그건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우린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흙먼지길을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딱히 목적지라기 보단 뷰포인트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탐험하다보니, 이곳이 정글인지, 사막인지 알길이 없었다. 다만, 이따금씩 길가에 피어있는 꽃과 저멀리 가득한 파란색 풍경을 볼때면, 마셨던 흙먼지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목적지가 없었던 덕에 우린 정말 구석구석을 여행할 수 있었다. 산 꼭대기에 있는 절도, 산정산의 카페, 그리고 인형같은 강아지도 오늘을 함께했다.
어딜 갈때마다 항상 마크는 묻곤 한다.
“혀니,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어. 여기랑 여기. 어떻게 할래?”
내가 무엇을 고르던, 아님 이유를 대지 않아도 항상 존중해줬다. 마치 이전의 나의 모습과는 정반대.
누군가와 함께 할때면 괜한 부담에 나 스스로 결정해버리거나, 선택권을 주더라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려 애썼다. 혼자 결정하고 혼자 고민하던 버릇에 아마도 함께하는 여행이 아니었을 거다. ‘과연 저런 여유로움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마크는 항상 물어봤지만, 난 어디든 갈 수만 있다면 좋았다. 오토바이를 탄 순간부터 웃음과 미소가 가득했는데, 뭐가 중요하겠어.
우린 완벽한 뷰포인트도, 일몰포인트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산 듬성듬성 자라있는 풀들을 지나고, 동네강아지들과 수다를 떨고, 흙먼지 한가득 마신 서로를 보며 웃고 떠들다보니 하루가 지나버린 걸.
집으로 돌아와 다시 풀장. 미처 느끼지못한 여유를 풀장에서 맥주와 마크가 틀어놓은 잔잔한 노래로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조용한 풀장에서 음악은 내가 만들어낸 물결을 타고 흘러갔고, 그곳에서 머리만 올려놓은 채 묵묵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빠알갛게 물들어버린 하늘, 구름과 태양이 적당한 조화를 통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평소와 다를게 없던 오늘이었는데, 오늘은 왠지 아름다운 것들만 눈에 들어왔다.
‘적당한 조화가 된다는 것, 이런 기분일까?’
어느덧, 고요한 풀장에 가득찬 나의 숨소리와 마크가 틀어놓은 잔잔한 노래가 적당히 뒤섞여 온몸을 빨갛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