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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티혀니 May 07. 2020

Ep9.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인간이야

[텝스 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점점 느슨해져간다. 느지막한 아침, 부스스한 머리를 한 생태에서 눈은 반쯤 감은 상태로 베이컨을 자르고, 반듯하게 토마토를 썰고, 스크램블까지 한상 차려먹었던 지난날.


조금씩 줄어간다. 재료도 식기도구도


내 앞엔 토스트기가 구워준 빵 두 쪽과 크림치즈, 방울토마토 몇 개, 그다음 콘푸라이트만 있을 뿐이다. 크림치즈를 덕지덕지 모서리까지 바르지 않음에서 나의 귀찮음을 엿볼 수 있다.



이걸 본 마크는 정말 크게 한 소리 하기 시작한다. 

“혀니, 너 아침식사 퀄리티가 아주 똥이구나”



“그런 줄 몰랐는데 내가 참 게으른 사람이더라고, 이젠 빵 굽는 것도 귀찮은걸…” 멋쩍은 웃음을 남기며 남은 반쪽 눈을 조금씩 깨워갔다. 그리곤, 오늘 앤서니랑 같이 바다 간다는 말에 환한 미소로 화답하며 오케이를 외쳤다. 





집에서 가까운 남쪽 해변으로 내려갔다.


야자수 사이로 드넓게 펼쳐진 파란색의 향연, 파랗고 먹먹한 하늘에 뭉게구름 몇 조각,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 색의 바다와 파도 소리. 두 가지의 파란색은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와, 오랜만에 휴양지에 온 것 같아’


휴양지에 한 달 동안 살면서, 휴양지에 온 것 같다는 말은 무엇일까? 



뜨거운 태양을 피해 나무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서양인들, 저 멀리 해변 한복판 자리를 깔고 누워 온몸으로 뜨거운 태양을 받아내고 있는 사람들, 휴양지의 풍경은 딱히 자연만이 만들어낸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휴양지의 분위기에 끼어들고 싶어, 한구석 자리를 잡곤 바다로 향했다. 괜스레 외국인 무리에 끼어들어 알아듣지도 못하는 불어를 듣곤 했고, 물살에 몸을 맡기곤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무엇을 생각하거나 고민하거나 걱정하거나 하는 마치 쓸데없는 노력 말이다. 가끔 코와 입으로 들어간 바닷물에, 온몸에 짠 기가 돌아도 저 발바닥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희미한 미소는 숨길 수 없었다.


시원한 바다에서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최소한으로만. 즐겨야하니까


저 멀리서 낯익은 모습의 사내가 해변가를 따라 걸어온다.



“헤이, 혀니!”, 남모를 외국인이 내이름을 불러온다.


“뭐야 제스퍼 왜 여기 있어?”, 운명이었다. 아니 사실 운명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고 많은 해변가에서 제스퍼를 만난다니. (사실 제스퍼가 나가고 나서 셋이 해변에 가지고 했었다) 



정말 특유의 멍청이를 뽐내 보이더니 어느덧 마크 옆에 자리를 깔고 앉아 해변의 여인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젠 뭐 반쯤 포기한 제스퍼라, 딱히 내 여유만 건들지 않는다면 괜찮았다. 가끔 시답지 않은 말로 대화를 걸어오지만 말이다. 



그래도 남정네들이어서 그런지, 테니스공 하나에 전기세의 서먹함은 사라졌다. 서로 테니스 공을 주고받으며 모래사장에서 뒹굴고 파도에도 이리저리 치여댔다.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나는 또 혼자만의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태닝은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다


뜨겁기만 했던 햇살이 몸 구석구석 파고들면서 온몸을 감싸주는 듯한 기분을 주었고, 잔잔히 틀어놓은 노래와 이 따스함으로 휴양지의 분위기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항상 바다에 가면 물놀이가 전부였는데 조금은 새로운 즐거움을 찾은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가장 잘 실천하는 자세가 바로 대자로 뻗는 거니까, 반쯤은 성공한 거다


대 자로 뻗어버린 나, 이러곤 한시간을 넘게 있었다.





항상 바쁘게만 살아왔던 지난 대학생활 동안, 바빠지는 법, 그리고 바쁜 와중에 소소한 행복을 찾는 방법에 몰두했었다. 바빠지는 법은 굉장히 쉬웠고 살기 위해 조그마한 행복을 찾으려 노력했던 까닭이다.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바빠서 힘든 게, 안 바빠서 걱정하는  것보단 나아서’라는 명분으로 달리기만 해왔다는 사실을.



이 생각이 와장창 깨지기 시작한 건 '태국 시골마을 빠이'에서이다. 코로나 덕에 장기 여행자만 남은 태국에서 정말 오랜만에 보았던 한국인이었다. 4-5달쯤 됐다더라. 둘 다 디지털노마드를 지향하는 까닭에 자주 호스텔 테이블에 모여 같이 일하곤 했었다. 



그러다 문득 들려준 이야기. 자신이 정말 간절히 원했던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1년 만에 퇴사한 것. 그 이윤 바로 균형’을 잡지 못해서라고 했다. 일과 사람, 그리고 자신에 대한 균형.



충격이었던 건 1년 만에 퇴사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게 원했고 간절했던 무언가가 이젠 증오로 바뀌어버린 것. 무서웠다. 내가 간절하고 소중하게 느끼는 것들이 어느 순간 절망과 증오의 감정으로 가득 차버리게 될까 봐. 그러면서 해주었던 한 마디 



“ 빨리 가려 하지 않아도 돼. 이번의 한 달로 네가 인생의 균형을 잘 잡아내면 남들보다 훨씬 더 오래 달릴 수 있는 거거든. 

나처럼 칼 졸업에 바로 원하는 회사에 취업? 무슨 소용일까. 
이미 1년 만에 더 많은 걸 잃었는데 말이야.

많이 고민해봐 어떻게 하면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 


정말 느지막히 일어나면, 이렇게 햇살이 조금씩 비추기 시작한다.


그날부터 온 힘을 다해, 아무것도 안 하고자 노력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은 사람이란 걸 내가 스스로 알아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지난 3년 동안 도전과 성장의 키워드로 많은 병을 앓아왔다. 끊임없는 도전만이 이 세상을 나아가는 지름길이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과 걱정거리는 반드시 인내해야만 하는 걸로 치부했다. 그게 병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체 말이다. 



그렇게 코사무이에서의 반달이 지나고, 난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걸 제외하곤 말이다. 



무얼 하려 찾지 않을뿐더러 그냥 온전히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욕구에 가득 찬 생활을 한다. 배고프면 먹고, 답답하면 바다를 보거나, 더우면 풀장에 들어가 수영하는 것들. 그래도 괜찮다는 걸 이젠 희미하게나마 알아채고 있다. 무수한 일상 속에서 흘러나오는 미소가 그걸 말해줄 뿐이다.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인간이니까 말이야”
그런 날 위로하듯, 커다란 달이 날 비춰준다. 밝은 대낮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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