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텝스 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밤새도록 배고픔에 시달렸다. 너무 일찍 잠들어버린 탓도 있고 잠에서 깨어 먹방유튜브를 찾아본 탓도 있었다. 결국 그렇게 3시간 정도를 설치다 결국 주방으로 향했다. 애매한 시간 덕에 일출을 보러 가기엔 늦어버린 탓에 밥이라도 먹어야겠다 싶었다.
어제 밤새도록 위층에서 음악소리가 들렸는데, 방음이 잘되지 않는 덕에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곤 확신했다. 비워진 위스키 한 병과 의자에서 잠을 자고 있는 앤서니를 보곤
취했다. 완벽히 취했구나. 음악에 심취해 밤새 혼자 춤췄을 앤서니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잘 깨워 들어가 자라고 했는데
“으음?? 여기ㄱ..ㅏ 좋아서 나온ㄱ..ㅓ야, 괜찮아”라며 반쯤 꼬인 혀로 더욱 알아듣지 못하게 말했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앤서니의 꼬인 혀로 맞춰질 수 있었다.
괜히 라면 먹는 소리에 깰듯해 조용히 라면을 끓이고, 라밥까지 든든하게 해먹었다. ‘아, 그냥 배고팠을 때 바로 올라와 먹을걸… 괜히 참았네.’ 어제 은근 많이 잔 덕에 오늘은 하루를 조금 일찍 시작해보려던 참이었는데, 애매하게 잠을 설쳐서인지, 아님 배가 뜨근하게 불러와서인지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점심이 다 돼서야 눈을 뜨곤, 올라가 커피 한 잔을 타 테라스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려던 참에 마크가 다가와 한마디 건넸다. “혀니 옛날 여행일기도 지금 쓰는 거야?”
저번 블로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 4년 전에 다녀온 유럽여행이야기를 지금 적어도 재밌을 것 같다는 아이디어를 던져줬었다. “아니, 그건 집 가서 격리되면 그때 쓰려고"
“뭔가 항상 노트북을 많이 보는 것 같아서. 그리고 영어공부도 어플로 하고 있잖아. 사실 우린 그런 영어 잘 안 쓰거든, 완전히 미국 영어야. 진짜 영어 배우려면, 우리랑 좀 더 대화를 많이 하는 건 어때, 여기에서 네가 가져갈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바로 우리랑 대화하는 거 아닐까?”
느긋한 생활과 여유로운 환경 탓에 놓치고 있었던 무언가를 알아채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끔 이렇게 들어오는 날카로운 조언은 미쳐 채우지 못한 여행의 구멍들을 하나씩 막아주고 있었다.
“맞는 거 같아. 내가 영어를 싫어한 것도 매일 공부하고 외워도 써먹지를 못했으니까. 오케이 오늘부터 조금씩 노력해봐야겠어!”
여기 와서 블로그 콘텐츠를 항상 고민했었고 하루에 두 개 이상 쓰는 날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꼭 당장이 아니어도 괜찮은 것들이니까. 나한테 어쩌면 블로그보단 이곳에서 몸으로 겪고 느끼는 게 더 중요하단 사실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성장 병의 잔재들. 오늘로써 하나 더 내려놓을 수 있게 될 것 같다.
“지이이 이이 이익”
우리의 탄성도 함께 들린다. 빨갛게 피어오른 숯덩이 위에 선홍빛 색깔을 띤 덩어리들이 올라가있다. 화력이 좋은 탓에 불이 타오르는 소리마저 즐겁다.
오늘은 바베큐를 하는 날이다. 거의 집에 입주했을 때부터 했던 이야기지만 11일차가 돼서야 기계를 닦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코리안바베큐를 궁금해했던 친구들을 위해 닭다리살과 삼겹살, 그리고 야채들을 준비했다. 막내라서 집게를 잡은 것도 있고, 그런 내 모습이 익숙해서 잡았던 이유도 있다.
소금과 후추 간을 한 고기 덩어리들이 하나 둘 뜨거운 불판 위에 등을 지지기 시작한다. 연기가 눈앞을 가리고 뒤에선 마크가 배고프다며 어린아이처럼 칭얼대기 시작한다. 마치 아들을 달래듯 아니면 강아지를 훈련시키듯 “기다려”를 연신 외쳐대니 호탕한 웃음을 내보인다.
거의 30분이 다 되어서야 다 구워진 고기, 바베큐 불판과 시원한 바깥 풍경, 그리고 등 뒤의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여기가 대성리나 가평 즈음 될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여기가 태국일까.
즉석으로 만든 간장 양념이 깊이 베어 마늘향이 솔솔 올라오는 닭 다리부터,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육즙이 흐르는 통 삼겹구이까지. 여기에 큼직한 양파와 새송이버섯을 함께하니 30분 동안은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했던 것 같다.
“나 여행 와서 먹은 음식 중에 오늘이 가장 만족스러운 것 같아”
다들 동의하지만 먹기에 바빴는지, 고개만 끄떡거릴 뿐 포크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곤 이번 주에 바베큐를 다시 해먹자는 이야기를 했다. 28살 마크와 32살 앤서니를 든든하게 먹였다는 사실에 25살의 막내는 흐뭇한 미소를 내보였다.
우린 바베큐에 한눈 팔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장에서 나누기로 했다. 각자 맥주 한 병씩 들고 내려가 옷만 대충 벗어던지고 온몸을 내던졌다.
배는 부르고, 저녁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시원한 맥주는 모자란 분위기를 가득 채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