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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티혀니 May 10. 2020

Ep15. 미소 하나, 웃음 둘

[텝스 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혀니, 프리다랑 마크 친구 오기로 했는데 새로운 곳 데려다준대, 같이 갈래?”



냉장고에 묵어가는 재료들로 무얼 만들까 단단히 고민에 빠진 나에게 앤서니가 부엌 창틀에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얘기했다. 항상 그러지만 앤서니가 물어보면 한 세 번쯤 되물은 뒤에야 이해할 수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수능 때 듣기를 다 맞아본 나에겐 호주 영어는 어쩌면 가장 어려운 난제이다. 스피커가 좋지 못해 윙윙 울려대는 듣기 평가보다 더 어려웠다. 



조목조목 단어 하나씩 되물은 뒤에야 표정이 밝아질 수 있었다. ‘해냈다’ 



마크와 앤서니가 참 좋은 건 항상 물어봐 준다. 덕분에 새로운 경험도 많이 할 수 있었고, 집에만 박혀있는 내겐 감사할 따름이다. 나도 조금 이기적인지, 제스퍼가 같이하자고 물어보면 괜히 싫다. 마치 뭐 하자고도 말하지 않았는데, 벌써 다음 주까지 바쁘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 



물론 우스갯소리를 조금 섞었지만, 분명한 건 뭘 하느냐보단, 누구랑 같이하느냐가 나에게 꽤나 중요한 포인트라는 것





“우리 그래서 어디 가?”, 프리다에게 내가 물었다.


"그냥 따라오면 알아", 그녀는 절대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지난번 해변에 갔을 때에도 시크릿 비치라고 하지 않나..



오토바이 네 대가 줄지어 따라나섰다. 목적지는 모른 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왼쪽으로 꽤나 높은 공원이 펼쳐졌다. 속으론 기억해뒀다가 다음에 와야겠다 싶었는데 어느덧, 우리의 선두가 방향을 틀어 들어가는 게 아닌가.



반듯한 도로가 나있다. 뭔가 끝이보이지 않는 저곳을 올라보고만 싶다.


입구에는 정말 많은 오토바이들이 줄 세워져 있었고, 각자의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강아지를 데려와 마음껏 뛰어놀고, 누군 저 높은 정상을 향해 빠르게 언덕을 질주하기도 하고, 공을 가져와 아들과 놀아주는 아버지도 있었다.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태국의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눈이 마주치면 다들 큰 미소로 반겨주는 마음씨. 마치 텁텁한 서울에서 느끼지 못했던 정을 이제야 찾았나 보다. 굳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지 않아도, 멋들어진 건축물 앞에서 사진 찍지 않아도, 이름 모를 누군가가 나를 반겨준다는 것, 여행에서 나에겐 가장 강렬한 인상이다. 



미소 하나로 함께 웃을 수 있는 곳, 코사무이이다.



“혹시 여기 언덕 이름이 뭐야?”, 괜히 기억하고 싶어 프리다에게 내가 물었다.


“그런 거 없어, 저번 해변도 그냥 이름이 없던 거야”


“뭐야, 또 시크릿 언덕이야?”



딱히 이름을 짓진 않나 보다. 생각해보면 이름 없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름이 없어 더욱 내 머리에 남을 것 같았으니까. 시크릿 비치, 시크릿 힐 



거짓말없이 체감상 60도는 될 것 같았다.


조금씩 올라가다 보니, 이름이 없어 잘 남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힘들어서 기억에 잘 남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어찌나 가파른지, 여길 뛰어오른다면 아마 그건 운동선수이지 않을까 싶었다. 저번 마크, 앤서니와 함께한 러닝에서 먼저 포기한 앤서니는 이번에도 뒤처지기 시작했다. 



앤서니와 친구 프리다, 위에서 놀리니 바로 ㅗ를 날려주신다.
그래도 이번엔 지기 싫었는지 뒤처진 마크 친구와 앤서니가 경주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열심히 뛰는 앤서니는 처음 보았다.


오를수록 오른쪽 능선을 따라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파랗게 펼쳐진 바다와 드문드문 떠있는 요트, 그리곤 갑자기 웬걸 앞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멧돼지인 줄 알고 혼자 도망칠 준비를 했는데 알고 보니 이곳에서 기르는 돼지였다. 마크가 장난치기 시작한다. “혀니, 한 마리 잡아갈까? 좋은 저녁이 될 것 같아”


 

갑자기 다가와서 놀란 본인


서른 마리가 넘는 돼지들과 양치기 강아지처럼 돼지 무리를 이끄는  두세 마리의 강아지들이 언덕의 햇살을 맞으며 식사가 한창이었다. 어미돼지에 세 마리의 아기돼지들이 서로 젖을 차지하기 위한 사투가 시작되었다. 눈도 뜨지 않은 채 열심히 코와 입을 비비며 찾기 시작한다. 



아름다움이라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마침내 각자의 것을 찾고 나니 세상 평화로운 듯이 열심히 식사를 시작한다. 어떤 동물이든지 이런 장면을 목격한다면, 색다른 감정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어미에 대한 경외심과 아름다움, 그저 상황이 아름다울 뿐이다. 매일 같이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먹어도 말이다. 



마크와 마크 친구 컨티다. 시원한 정경이 내려다보인다.


땀 범벅으로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건 꽤나 즐거웠다. 내려가며 좀 더 많은 것들에 집중할 수 있어서 말이다. 



코사무이 사람들에게 더 많은 미소를 받을 수 있었고, 그만큼 웃음으로 다시 돌려줄 여유가 있었다. 나를 향한 누군가의 미소가 코사무이의 기억이 되었고, 그게 곧 태국 여행에 대한 좋은 인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곤 태국에 다시 올 이유가 생겨버렸다
시크릿 힐이다. 괜히 행복한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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