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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티혀니 May 09. 2020

Ep14.어쩌면, 나에게 여행은 바다에 몸을 맡기는 것

[텝스 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 여행에


Ep14. 어쩌면, 나에게 여행은 바다에 몸을 맡기고 다시 해변으로 돌아가는 일이겠지




굿모닝. 뚱 뚱 뚱, 빠빠빠빠빠

엄마의 잔소리보다 더 듣기 싫은 그놈이 찾아왔다. 7시 50분. 나에겐 아직 10분이란 시간이 남아있다. 의식하고 있지만 마치 잠결에 누른 듯 스스로를 속이고 다시 잠에 빠져든다.



또 한 번 시끄럽게 알람 소리가 울려댄다.



필사적으로 끄고 핸드폰을 열어 확인해보았는데, 마크에게서 문자 하나가 와있었다. 너무 졸려서 9시에 가자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뿜어져 나오는 미소를 애써 숨긴 채, 피곤하면 더 자라고 문자를 보낸 뒤, 기억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마크보다 더 빨리 잠에 든 것 같다.



아침에 잠을 길게 자는 덕분에 생활패턴이 뒤틀린 것 같아, 기상시간을 조금 앞당기기로 했다. 그냥은 의지가 되지 않아, 아침에 러닝을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마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이미 미룰 때부터 느낌이 왔기에, 적당히 빵 쪼가리와 함께 커피로 하루를 시작했다. 뭐, 덕분에 일찍 일어나게 되었고 오랜만에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맡으니 기분이 새로워 새삼 여행에 왔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9시면 사실 아침도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조촐해지는 아침 식사





어느덧 2주 차가 흘러가며, 점점 요리하는 모습을 보며 완벽히 생존에 적응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지난주엔 약간의 보여주기 식 혹은 감성 가득한 요리를 했다면, 이젠 그렇지 않다.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스캔한 뒤, 오직 그 재료만 가지고 요리한다. 토마토가 없던, 양파가 없던 딱히 개의치 않는다. 사는 것도 돈이고, 무엇보다 귀찮을 따름이다. 



항상 먹는 재료들만 순식간이고 남는 재료들은 냉장고 안에 깊이 박혀있는 덕에 냉장고에서 내 돈이 썩어가고 있었다.


감성도 뭐 돈이 있고, 다른게 충족돼야 챙길 수 있는 거지 생존과 감성은 참 거리가 멀었다. 바비큐하고 남은 새송이와 양파, 호박 수프하고 남은 사과, 썩어가는 바질 잎, 물론 새우가 있어 다행이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넣어 볶고 파스타면을 넣은 뒤, 소금만 넣으면 된다. 일전에도 말한 적이 있다. 음식은 간만 맞으면 다 맛있다고



아니면, 배가 덜 고픈 거겠지 




거봐, 배고프면 다 맛있다니깐





항상 이른 저녁식사를 하는 내가 식사를 할 때쯤이면 슬슬 나갈 때가 됐다는 신호이다. 오늘은 웬일로 제스퍼가 가방을 메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오늘은 여자랑 약속이 잘되지 않았나 보다. 거의 드물지만 오랜만에 넷이서 한적한 도로를 넓지 감히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차웽비치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이유는
저 멀리 거센 파도들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하고 있기 때문일까? 



한적한 해변으로 자리를 옮기자 제스퍼가 툴툴대기 시작한다. "너무 멀한 지않아? 여기 사람들 있는 곳에 있지"



아무래도 제스퍼는 사람 많은 곳이 더 좋은가 보다. 여자 때문일까?



물을 무서워하는 제스퍼를 빼곤 꽤나 깊은 바다까지 나가 파도를 맞았다. 처음으로 파도치는 해변. 마치 끝없는 수영장에 나 혼자 온 듯, 마구 헤엄치기 시작했다. 딱히 물안경도, 수영모도 필요 없었다. 눈을 뜰 이유가 없었으니까. 



드넓은 해변으로 달려가기


눈을 감고 무작정 헤엄치기 시작했다. 숨이 거칠어져 멈추기 직전까지 말이다. 손끝엔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그저 계속 물살을 가르고, 파도를 거슬러 나아갈 뿐이었다. 



그렇게 소란했던 발짓을 멈추고 잠시 일어나 눈을 떠보니 여전히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기운찼던 에너지를 다 쏟은 탓에 다시 해변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파도에 몸을 싣고 침대인 양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따금씩 거센 파도가 칠 때면 눈과 코를 아리게 했지만, 넘실대는 바다에 한 조각이 되어 흘러가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힘차게 파도를 거스를 때는 듣지 못했던, 그리고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과 귀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결 풍경이 아름다워 보일 뿐이었다. 



어쩌면 나에게 여행은 바다에 몸을 맡기고
다시 해변으로 돌아가는 일이겠지. 


굳이 돌아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마음과 몸을 꽉 붙잡는다고 더 빨리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더욱 지칠 뿐이야. 



해변에 돌아가면 다시 거센 파도를 따라 더욱 먼 곳으로 헤엄쳐야 하는 걸 알기에, 오늘 난 파도에 몸을 맡기는 법을 배워간다. 힘주지 않아도 엉덩이에 모래알이 닿는 순간이 찾아올 거니까.



갑자기 공을 던져오는 마크


액티비티 광인 마크가 몸이 근질근질한지 저 멀리서 초록색 공을 던져온다. 앤서니와 함께 삼각편대를 이루어 캐치볼을 하기 시작했고, 한참을 던지니 어깨가 저려왔다. 아무래도 서양의 어깨는 따라갈 수 없나 보다, 어찌 멀리 던지는지. 



힘에 지쳐 한구석 자리를 잡고 오늘은 태양에 등을 내주었다. 목은 타기 싫어 그늘에 목만 쏙 넣어둔 채로 말이다. 대신 해가 저물어감과 동시에 나는 계속 태양을 따라 점점 내려가야 했다. 그늘이 내 등을 전부 덮어버리기 전에 말이다.


멍하니 바다를 쳐다보는 일이 취미가 되었다.






모래사장 한편에 자리 잡고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니 참 재밌다. 온몸으로 맞을 땐 온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력했던 파도, 멀리 선 그저 하얀색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일 것 같고 항상 매 순간 나를 흔들었던 파도도, 결국 지나고 보면 그리 큰일은 아니었던 것처럼.



돌아와 주스 한 잔으로 입가의 짠 기를 시원하게 내려보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간다. 




눈을 살며시 떠보니 아직은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해변까지는 2주 남짓한 거리, 살며시 미소를 짓곤 다시 눈을 감는다. 



넘실대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그렇게 나의 여행은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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