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 유일한 그대들에게 띄워요 2
아인아~ 우리의 시간이 길지는 않았어. 그래서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좋아. 나는 그 시간을 잊을 수 없거든. 언제든 혼자서 이렇게 꺼내볼 수 있으니까.
아인이 앞에 서 있었던 4분가량의 시간이 마치 4시간처럼 느껴졌는데 말이야.
그 시간이 잊히지 않은 이유는 전부 실수 때문이야. 그 장소에 함께 했던 다른 대학부 친구들, 아인이와 아인이 동료들, 뿐만 아니라 소년원 관계자분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실수가 뭔지 기억하지 못할 거야. 이제는.
아인이와 다른 친구들을 찾아가기 위해서 말이야.
우리끼리 준비 시간을 가졌거든. 사실 그런 준비는 처음이었어.
공동체에서 준비한다니까 '같이 가야 하는 거겠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어.
정작 중요한 준비가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당시, 나는 타인을 위해 마음 한 켠조차 비워두기가 버거웠거든. 마음 건강이 나빠서였어.
그리고 난 말이야. 나 자신을 많이 미워했어. 얼마나 밉고 싫었던지, 소중한 삶을 그만 끝내고 싶더라고.
그렇게만 된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방법을 찾으려고 굉장히 집착했어.
우습지? 맞아! 자살이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은 했고. 하지만 하루속히 '생'을 마감하고는 싶고.
부끄럽지만 아인이 네가 있던 곳을 방문하려는 나의 근본적 동기였어.
공동체가 추구하는 대의는 공식적이고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나의 동기는 이기적이고 초라했지.
사는 게 어차피 '고생'이고 특별히 대단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아주 멋진 삶을 살아낼 것 같지도 않더라고. 나의 아버지 그리고 기성세대들에게 표출하지 못한 반항심이 때로는 자책감으로 바뀌기도 했고, 이런 모든 감정들이 삶의 의욕을 빼앗아 갔어. 그렇다고 대놓고 반항하면서 사회 변혁을 일으킬만한 개혁자가 될 나도 아니거니와.
그러다 보니, 20대 30대 내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게 뻔했어. 삶의 주요 내용은 그렇게 어정쩡하게 채우고, 축적된 욕구불만은 적당한 쾌락들로 해소하면 살겠구나 싶었어. 짐작이라기보다 확신에 가까웠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더라고.
빨리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공동체'라는 걸 만나게 되었고, 공동체가 아인이를 만나러 간다니까, 이런 일을 많이 하면 하루라도 빨리 죽을 수 있을까 싶었어. 하하하 지금 생각하니까 내 생각 참 우습다.
나의 이유가 어찌 되었든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 있을 테고, 그렇다면 미안해.
그래. 배가 불러서 그랬을 수 있지. 원래 자살 같은 우울증상은 생존이 급급할 때 나타나는 병은 아니니까. 생사의 문제가 시급한 국가 혹은 정글에서는 '자살'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거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배부른 그 '병'덕분에 아인이 너를 만날 수 있었잖아. 마음이 그 정도까지 아프지 않았다면 살아오던 방식대로만 살았을 거야. 늘 익숙하던 사람들과만 만났을 거고 더 화려한 장소를 찾아가서 즐기려 하고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면 '병'덕분에 그전까지는 찾아 나서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려고 찾아가기 시작한 거였지. 인생은 항상 좋은 게 다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다 나쁜 게 아니더라. 그치?
아인이와 그곳에서 만나게 될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드라마'나 짧은 '공연'을 준비했거든. 약간의 간식도 함께 말이야. 나는 그때 춤공연을 준비하는 팀이었어. 이 공동체에서 준비하는 공연은 이전에 공연들과는 목적과 준비 과정 모든 게 달랐는데. 배경 음악부터 차이가 났어.
그런데도, 내가 처음으로 참여하다 보니, 차이를 적용할 능력은 없었어.
모든 퍼포먼스를 통해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 즉 관람하는 친구들을 향한 진심 어린 마음만 녹여내고, 다른 모든 이기적인 동기는 버려야 했더라고. 이런 공연의 처음이자 마지막까지 관람자들의 마음에만 집중해야 했어.
쉽게 말해, 공연하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마음을 가질 바에는 공연에 서지 않는 게 옳았던 거야. 온전히 아인이나 그곳에서 함께할 친구들을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정화하는 게 '준비'의 시작이자 마치는 일이어야 했어. 순전한 마음을 위해 계속 기도하는 게 '준비'였어. 그래야, 공연 중에 무엇을 하던 용기, 위로와 희망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거고, 관람하는 친구들 또한 흘러오는 좋은 마음을 선물로 누리게 되는 거였어.
당시의 나는 자기중심적인 내 마음을 관찰할 여유가 없었어. 외양적 표정과 동작만 흉내 내는 춤으로 아인이나 친구들에게 줄 수 있는 선한 선물은 없었어. 이 원리를 몰랐던 거야. 나의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공연에 참석하지 않는 게 되려 돕는 것인데 말이야.
안타깝게도 나의 첫 방문 준비는 고장 난 것이었어. 춤 동작의 순서가 틀리지 않아야 한다는 집념,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나 자신을 자랑하려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어. 이전의 스포트라이트 받았던 공연처럼 말이야. 현실은 어땠을까?
춤공연 팀 멤버 중 유일하게 정지 자세로 우두커니 서있어야만 했어. 그전까지 나는 무대 위에서는 오히려 집중력이 높아지는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공연 준비를 분명히 했는데, 꼼짝할 수 없었어. 당시 느낀 당혹감과 수치심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나에게 그 경험은 대참사였어. 할 수만 있다면 무대밖으로 뛰쳐나가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지.
그럴 용기조차 없어서, 음악이 마쳐질 때까지 그렇게 서 있다가, 간신히 무대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어. 도망갈 장소가 마땅치 않아 한 곳에 멍하니 앉았어. 크게 울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경직된 얼굴을 감출 수도 없었어. 모든 사람들이 살아 있는 공간에 나만 정지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 같았어. 호흡은 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막상 무얼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 그냥 가만히 있었어.
혼란스럽던 머릿속과 감정이 정리된 시간이 오긴 오더라고.
그때 깨달음 하나가 진하게 다가왔어.
나의 이기적인 동기를 비워내지 않는 선행은 의미 없는 몸짓에 불과했어. 상대를 진심으로 생각하며 상대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마음의 빈 공간을 만드는 게 먼저였어. 그런 마음이 없는 선물로는 상대를 오히려 더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거였어. 무대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준비하는 게 전부일 수 있더라고.
마음이 없는 수단, 그게 선물이나 선함으로 포장된 무엇이든, 악취 나는 쓰레기가 될 수도 있겠더라.
타인을 위한 선물은 나의 만족을 구하는 것을 정화하는 과정자체라는 걸 배웠어.
아인이와의 만남 덕분에 알게 된 깨달음이었어.
멍청했던 나를 보여주면서 얻게 된 교훈이고 말이야.
신의 선한 지혜겠지?
아인이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언제 깨달을 수 있었겠어?
그런 의미로 미숙하고 어리석었던 나에게 아인이 너를 방문할 기회가 주어져서 무척 감사해.
순자 할머님 안녕하세요.
ㅎㅎㅎ 할머니께 마음으로는 자주 메시지를 띄웠어요.
이 글을 더 빨리 쓸 걸 그랬나 봐요.
과거의 저처럼 하루하루가 답답한 청년들에게 이렇게나 좋은 소식을 일찍부터 알렸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네~ 저 자랑하는 거 맞아요. 순자 할머님.
할머님을 만났던 시간은 저의 자랑 꺼리거든요.
착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 시간이 너무 따스했기 때문이에요.
제가 사실 매우 깍쟁이 같은 면도 있고, 꼴에 결벽증도 있었어요. 지금은 결벽증은 치료되었지만요.
이기적이고 깨끗한 척하기로는 선수였던 20대를 보내고 있었어요.
저의 친할머니도 외할머니도 돌아가신 이후에 순자할머님을 만나러 갔어요.
어떤 청년들이 다음 방문은 요양원이 될 거라 했어요. 그곳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시는 할머니들과 할아버님들을 목욕시켜 드리기 위해 간다고 했죠.
그 제안에 대해 처음 듣자마자, 저는 자신이 없더라고요. 저의 결벽증조차 해결하지 못했던 시기였거든요. 엄마 외에 누가 내 몸을 만지는 것도 싫어하고, 외할머니가 저의 배를 만져주신 기억이 있긴 했지만, 그건 너무 어릴 때 기억일 뿐이었어요. 할머님 두 분 모두 돌아가신 지 한참 지난 때였고요.
외할머니와 할머니 두 분 다 중풍으로 쓰러지신 후 오래도록 아프셨죠. 그때 제 마음이나 정신적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어요. 그리고 당시에 저는 아마 제 아이를 낳아 길렀다 해도, 결벽증 때문에 기저귀 갈아주는 일조차 힘들어했을지도 몰라요. 양육하는 엄마 모습이 아니라 양육 처음 아버지들처럼 코를 막았을 거예요.
이런 제 속 마음을 누구보다 제가 잘 아니까, 걱정부터 되었어요. 시작도 하기 전인데.
그런데 목욕탕이라는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마법에 걸린 것처럼 평안하고 즐거웠어요. 할머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어요. 할머님의 참하고 인자하신 얼굴도 좋았고, 할머니의 피부를 씻겨드릴 때 하나도 불편해하지 않으시고 저에게 얘기해 주셨잖아요.
"고맙소."라며 따스하게 인사해 주셨는데, 목욕탕의 따스한 물보다 훨씬 따스했어요.
저의 걱정과는 달리 제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이 행복했어요. 그 일이 너무 쉽다 못해, 무척 좋다는 생각만 들어서, 감사했어요.
할머님들처럼 저도 당시에는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서로의 외로운 마음을 따스하게 씻어 주고 위로할 수 있는 시간이었나 봐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공간과 시간이 그립네요.
즈밍~ 이제 내가 기억조차 나지 않겠죠? 당연한 상황이겠지만, 안부를 묻고 싶어요.
즈밍 잘 지내요? 그때는 즈밍이나 저나 학생이었죠.
시간이 흐른 지금 즈밍은 결혼을 했을 것 같고, 아이들도 있을 것 같아요. ㅎㅎ
즈밍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제가 즈밍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대만에서 보내는 동안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무슨 일을 하던 열정적이었으니까요. 덕분에 즈밍도 만났고요.
주소를 알려 달라는 즈밍의 요청에 별 기대 없이 정보를 주었는데, 제가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즈밍의 편지가 도착했죠. 너무 반갑고 기뻤어요.
답장을 바로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 상태가 건강하지 못했어요. 그런 해외 훈련을 마치면 저에게 나타나는 증상들이 있었거든요. 집으로 돌아온 뒤, 제 상태는 현지의 모습과는 달라졌어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겪는 현실적 삶과 해외 현장, 새로운 도시에서 겪는 단체 활동 사이의 괴리감 때문이었죠. 혼자가 되면 다시 침체되거나 우울해졌어요. 어떤 때는 현장에 다녀오기 전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졌어요.
아무래도 일상에서 겪지 못한 상황을 단기간 타지에서 체험했기 때문이겠죠.
게다가 타이완에서는 저는 이미 리더였어요. 팀장 역할을 담당했는데요. 팀원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어떤 목적이던지, 일단 목적이 생기면, 지나치게 집중하는 성향도 있었어요. 강한 책임감에 휩싸인 채 공동체 친구들과 특히 팀원들과의 관계에 몰입했어요. 2개월 정도 기간일 거예요. 중요한 문제는 관계의 밀도일 거라 생각해요. 그 기간 동안 한 팀으로 만들기 위해 팀원들과 가족관계 같은 친밀감을 급속히 형성하기 위해 애썼어요.
결국, 즈밍의 잘못은 전혀 없어요.
제가 그 모든 사역에 대한 무게감을 감당하느라 너무 진을 다 뺀 탓이었죠. 해외 현지에서 돌아오고 나면 항상 증상이 비슷했어요. 인도부터 시작해서 여름과 겨울 방학을 이용해 1년에 2번씩 비슷한 일정을 소화해 냈거든요. 학기 중에도 팀장외에 다른 역할을 해내고요. 그중 해외 훈련 리더십을 마치고 나면 그 후유증이 가장 심했어요.
인도 첸나이를 시작으로 해서 일본 오사카, 대만 타이완, 러시아 모스크바, 이스라엘과 북경등을 다녀왔는데요. 그러니까 즈밍을 만난 타이완은 해외로는 3번째 훈련이었네요.
어디든지 해외를 다녀오고 나서 1개월 동안은 저만의 병을 다시 앓았어요. 섭식 장애를 비롯해서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고 스스로를 힘들게 했어요. 그로 인해 체중이 항상 5kg 이상 늘었어요. 현장에서 보낸 시간 동안 제 마음과 에너지를 너무 한꺼번에 쏟아 버린 탓에, 서울에 돌아와서는 닥쳐오는 허전함과 고독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지혜가 없었어요.
분명히 즈밍은 타이완에서 만났던 에너지 넘치고 밝게 웃고 있는 저를 기억하며 편지를 썼을 텐데, 서울 집에서 폭식증과 거식증 종종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는 모습으로 답장을 쓸 용기가 없어졌어요. 잊힐 만큼 오래된 이야기지만 미안했어요.
즈밍의 편지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요.
그때 보내지 못한 제 마음의 편지가 마치 끝내지 못한 미션처럼 즈밍의 편지처럼 남아 있어요.
지금이라도 즈밍이 편지를 통해 나를 기억해 주고 그리워해주는 마음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전하고 싶어요.
즈밍의 도시에서 즈밍, 다른 젊은 친구들 그리고 그 도시 사람들과 함께 했던 행복한 시간 덕분에 저의 아팠던 마음이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어요. 함께 해서 고마웠어요.
참 훈련을 2년 정도 강행군 하고 나서, 저의 체중은 최종적으로 15kg 이상 늘어버렸어요. ㅎㅎ
또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야만 했어요. 외모가 바뀌니까 관계의 느낌도 정말 많이 달라지긴 했어요. 또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다시 건강하고 보기 좋은 모습으로 바뀌었지만요. 그렇게 외모가 바뀌어 본 경험을 통해 내면부터 가꾸는 유익과 평안도 깨닫게 되었어요. 결국 지금은 제3의 새로운 모습으로 살게 되었어요. 저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내면과 외모 모두 건강해진 자아상을 갖게 된 거죠. 정말 긴 여정이었어요.
지금은 거식증, 폭식증 그리고 우울증도 모두 다 나았어요. 15kg 늘었던 체중도 완전히 사라져 없어졌고요.
즈밍 이제 제가 실낱처럼 기억나세요? 기억한다 해도, 나의 밝고 당당한 모습만 기억할 텐데, 답장을 못한 이유를 얘기하자니, 연약함과 병약했던 시절까지 다 드러내 얘기하게 되네요.
즈밍도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네요.
즈밍에 연약함에 대해서도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지금의 저처럼 솔직하게 잘 소통하고 있을까요?
즈밍이 보낸 주소가 잘못된 것도 아니었는데, 이제 답을 띄워요.
이 편지가 즈밍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이건 또 다른 기적을 바라는 기분이에요.
잘 지내요. 즈밍.
보낼 편지가 남아 있어서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