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 유일한, 그대들에게 띄워요 3
복희 이모님
안녕하세요. 시간이 꽤 흘렀어요. 하지만 계절은 이맘때즈음이었죠?
복희 이모의 환한 얼굴부터 떠올라요. 저는 요즘 일상에 집중하는 시기를 보내요.
가끔 이렇게 이모님을 뵀던 시간도 떠올리면서요. 복희이모를 만난 건 노숙자 쉘터였잖아요.
제가 이런 방문에 참여할 때면, 걱정하는 한 가지가 있었어요.
그건 제 마음이에요.
마음과 행동을 세트로 묶었을 때 서로 어울리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죠.
노숙자분들 뵐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겉으로는 그분들의 식사나 예배드리는 과정을 돕는다면서 속으로는 타인의 형색이나 삶에 대해 쉽게 판단하는 마음을 갖을까 봐서요.
각 사람의 상황과 사정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한 분 한 분을 평가하는 마음이 혹시 갖는다면?
그 마음을 스스로 직면하게 된다면 그 자체가 괴로울 테니까요.
하긴, 걱정하던 상황이 전개된다 하더라도 방법이 아주 없진 않죠.
제 마음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거죠.
'저도 모르게 평가하는 마음이 들어요. 교만한 마음인 건 아는데, 제 마음을 돌봐 주세요. 제 노력과 힘으로는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저분을 이해하는 마음조차 갖기 어려워요. 하지만 사랑의 신께서 원하시는 사랑으로 대하고 싶어요. 저에게 새 마음과 새 힘을 주세요.'
기도하면 바로 응답되었냐고요? 복희이모님도 이미 경험하셔서 저보다 더 잘 아실 텐데요. ㅎㅎ
금세 마음이 바뀌기도 하고 훈련이 더 필요한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 때는 반복해야 했죠.
종종 아무리 훈련해도 바뀌지 않는 상황과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 때는 그저 외면하는 법을 배워야 했어요.
사람이 스스로의 마음조차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수용하는 계기로 받아들이는 거죠.
쉘터에 도착하기 전까지 한 걱정이었죠.
'노숙자분들의 그대로를 친구나 가족이 곁에 있는 것처럼 대할 수 있을까? 같이 밥을 먹을 때도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데 걱정과는 달리 현장에서 활동에 참여하는 시간에는 복희이모님만 매우 크게 보였어요. 이모님의 밝은 얼굴과 태도가 환하게 돋보이니까 다른 것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술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간이었어요. 제가 함께 하는 분들이 노숙자라는 인식자체가 작아져 버렸어요. 복희이모님의 미소의 신비한 마법 때문 일거예요. 저도 이모를 따라 조심스럽지만 최선을 다해 여기 저리로 민첩하게 움직였는데 나중에 재미까지 생겼어요.
쉘터에서 식사 제공 봉사를 함께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뜻깊고 귀한 시간이었어요.
금보다 귀한 가치가 사람이 사람을 섬기고 존중하는 마음일 거잖아요.
이모님과 선한 일에 동참하는 분들이 함께 하는 그 공간이야 말로 금보다 존귀한 보물이 쌓이는 공간이었어요. 보이지는 않지만 보물섬은 그곳이라는 생각이에요. 세상에서 보기에는 가장 없어 보이는 분들 안에 '마음의 황금'을 베푸는 장소가 그곳이었다니 신비한 경험이었어요.
섬기는 일은 항상 그런 거 같아요. 섬기는 행동을 하는 본인에게 가장 선하고 좋은 일이 되어 버려요. 운동처럼요.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하고, 매일 운동하더라도 매 번 낯설지만 착한 고통을 체험하고요. 하지만 운동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천국의 맛, 기쁨을 누리거든요.
건강해졌다는 믿음과 하루동안 어떤 종류의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게 운동인데요. 그 시간 동안 복희이모님 얼굴의 화사한 표정을 보면서 비슷한 확신이 들었어요.
'복희이모님의 운동이자 영양제는 타인을 위한 사랑의 나눔이구나!'라는 생각이요.
이모님만큼 능숙하지는 못했겠지만 노숙자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복희이모님 덕분에 저도 덩달아 화목한 시간을 보냈어요. 저야 한두 번 참석하는 거지만요. 이모님은 꾸준히 몇 년째 동일한 일을 꼭 이모님 자신의 집안일처럼 해내시더라고요. 행복한 미소 덕분에 더욱 존경스러웠어요.
그러고 보니, 노숙자분들도 몇 해 전까지 가족도 있고 직업이 있었겠죠? 각 자의 사연이나 상황이 다르지만 자립심을 잃게 된 어떤 이유가 있으셨을 테고요. 그런 분들을 대하시는 복희이모님의 마음과 눈빛은 함께 하는 저의 마음조차 빛으로 비춰주셨어요. 이모님 덕분에 그때 제 마음에 간직해 두었던 '황금 네 돈'을 지금 꺼내보네요. 금값도 올랐던데, 이 네 덩이는 10배, 30배, 100배의 가치로 커져 버렸어요.
저는 요즘 신도시에서 학생들을 만나며 지내고 있어요. 학생 친구들 공부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어서요.
여기 와서 놀란 점은, 서로 비슷한 집에서 큰 차이 없어 보이는 가족끼리 살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제 조카만 봐도 '노숙자'라는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요. 대부분 신축 아파트에서 살고 있거든요.
이웃, 특히 사회적인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 대한 마음과 손길을 우리 친구들은 어떻게 배워갈까? 생각해 보곤 해요. 그렇다고 걱정하진 않아요.
저라고 어릴 때부터 복희이모님 같은 분을 항상 보면서 자라온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조카가 대학생이 되면 복희이모님 만났던 '황금 동굴'에서 마음의 금을 캐기 위해 같이 방문하려고요. 그 시간을 위해 지금부터 기도하고 싶어요. 따스한 복희이모님 존경합니다.
이모님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이기자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께서는 저를 기억하실 것 같아요.
선생님의 얼굴 표정이 저도 잊히지 않거든요.
요청 때문에, 강대상 앞에 서 있기는 했지만 제 마음이 위축되었고 같이 힘들어졌거든요.
물론 제가 신경 쓰지 않으면 될 일인데, 자꾸 신경이 쓰였어요.
반면, 모스크바 현지 목사님께서는 한국의 대학생들이 먼 나라까지 와줬다며 좋아하셨죠. 러시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주는 학생들이라면서요. 고마우셨던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으셨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중 누구든, 대학생 한 명이 대표로 목사님을 대신해서 말씀을 전해주길 바라셨잖아요.
하지만 그 요청사항이 이기자 선생님(선교사로 파송받아 현지에 계시던 한국인 목사님)께는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았어요. 저희는 당시 3팀이 연합해서 공동으로 팀사역 중이었거든요. 총 40여 명이었던 저희 모두에게도 그 요청이 부담된 건 사실이었어요. 간증도 아니고 설교를 부탁하셨으니까요.
어쩌다 보니 3명의 팀장 중 제가 뽑혔어요. 떨렸지만 강대상 앞에 서야 했죠.
러시아 현지에서 유학 중인 한국학생이 통역을 맡았고요.
그 자리에 서니까 러시아 현지인들의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훤히 다 보였어요. 기대감 넘치는 시선들 사이로 이기자선생님의 시선도 함께 마음에 들어왔어요. 선생님 자리가 앞쪽이어서 더욱 그랬던 거 같아요. 시선으로도 우리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선생님의 시선을 통해 제가 느낀 마음이었어요.
'저분은 대학생이 설교하는 게 못마땅하신 거 같은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굉장히 불편해하시는 표정이야. 우리가 떠날 때까지 저런 표정이실 거 같아. 단 한 번의 설교인데, 그게 그렇게 싫으신 걸까?'라고 생각했어요.
요청을 받고,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죠. 준비시간은 짧았지만 진솔하게 전하면 될 거라고 믿었어요.
모스크바 현지에서 서로의 삶이 전혀 다른 동료들과 제가 가족처럼 지내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그 시간 느낀 점을 솔직하게 나누면 될 테니까요. 게다가, 모스크바를 당장 떠나고 싶을 만큼 어려운 상황을 저희 팀은 겪고 있었거든요. 그 와중에 이기자 선생님과 제가 만난 거죠.
설교 당일에도, 외부에서 사역하는 하는 동안 누구 한 사람,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졌던 것처럼요. 팀 안에 벌어진 예기치 못한 사건은 저의 육체 안에 담아뒀던 모든 눈물을 몽땅 쏟아내게 만들었어요.
사실 매 번의 해외 훈련 현장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훈련은 없었어요. 해외에 나가는 횟수만큼 힘든 강도마저 더불어 높아지기만 했어요. 그렇게 볼 때 모스크바현장은 최전선 같았어요.
다만, 모스크바는 최초로 숙소는 나쁘지 않았어요. 생쥐들의 달리기 경주도 없었고, 아이의 손바닥 크기만 한 바퀴벌레가 수시로 나타나지도 않았고, 항상 바닥에서만 잤던 우리였는데요. 최초로! 침대를 사용했거든요. 학교 기숙사 같은 환경이었죠.
'잠시지만 <안식>이라는 걸 누리는 걸까?'라는 기대감까지 생겼어요.
기대감의 불꽃이 촛불처럼 꺼져 버린 사건이 곧장 생겼지만요. 팀원 중 한 명이 입에 거품을 물더니 갑자기 쓰러졌어요. 서울에서 훈련 준비 내내 온순해 보였던 세나였어요. 팀워크에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참하고 똑똑해 보였던 친구였죠.
그렇게 한 번 쓰러지더니 눈을 뜬 이후로 강한 사람으로 돌변해 버렸어요. 마치 자신의 육체 안에 로봇이나 돌비석이라도 꽉꽉 채워 넣은 사람처럼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괴기한 연기를 하는 사람처럼 말을 툭툭 내뱉었어요.
저희 외할머니가 생각났어요.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가끔씩 다른 존재처럼 변하는 모습을 지켜본 기억이 있었죠. 그 모습과 비슷했어요.
처음에는 너무 두렵고 참담했어요. 걱정돼서 펑펑 울었어요. 제 몸 안에 있던 수분이 전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어요. 울면서 기도했지만 세나로 보이는 이상한 로봇은 꿈쩍도 하지 않더라고요.
점점 깨달아갔어요.
'세나가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변해야 한다. 그래야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변해버린 세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제가 '강철 로봇 마징가'로 무장해야 했죠.
내적 전쟁은 정원을 가꾸는 것처럼 부드럽고 고요하게 다룰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어요. 말 그대로 전쟁터라고 실감했어요. 다른 한 가지는? 전쟁 상황에서는 철저하게 외롭고 고독해져야 했어요.
같은 시공간에서 공동체의 수백 명이 함께하고 있었고, 리더들도 있었지만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었어요. 각자 자신만의 짐이 있는 상황이잖아요. 자신만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벅찬 상황일 테고요.
저에게 닥쳐온 문제의 원인 제공자가 저는 아니었지만 저희 팀에서 일어난 문제니까 '제 문제'였어요. 제가 책임을 맡아야 하는 상황이었죠.
결국, 집단속에서 오직 세나와 저만 따로 분리된 느낌이었어요. 무리 속에서 둘만 유달리 존재감이 부정적으로 드러나는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지금이라면 최고 리더에게 "못 하겠다"라고 "나는 다루기 힘든 문제이고 나 또한 연약한 학생이다."라며 토로라도 했을 텐데요. 그때의 저는 그럴 주변머리도 없었어요. 어떤 상황이나 책임이 부여되면 다른 경우 수를 생각할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저였죠.
세나는 제가 강대상에 오른 시간에도 선생님이 앉아 계신 좌석 중에 한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이기자 선생님과 모스크바 현지인들, 공동체 친구들 속에 여전히 함께 하고 있었어요.
설교 자리에 서고, 안 서고의 문제는 저한테 관심 가질 안건조차 아니었던 거죠. 어떻게 보면 서 있어서도 앉아 있어도 제 모든 신경은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세나에게만 곧 두서 있었어요.
제 경황이 어찌 되었든, 제가 전했던 '사랑'을 주제로 한 미숙한 메시지를 들으시던 모스크바 현지인들이 기뻐하고 감격하는 얼굴로 반응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동일한 시각 다른 낯빛이 잊히지 않지만요. 이기자 선생님의 얼굴이었어요. 세나의 반응과 함께요.
편지를 띄우다 보니,
선생님께는 제가 세나와 함께 치르고 있었던 내적 전쟁을 전달했던 게 옳았을 것 같아요. 전쟁을 통해 실감한 고통과 외로움, 그 와중의 신념을 통해 상황을 제압하려 했던 저의 몸부림을 전달해 드리는 게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말씀드리면서 편지를 띄워요.
세나와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냐고요?
넋이 나갈 만큼 울고 났더니 오히려 초연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제야 다른 방향의 생각이 떠올랐어요.
'세나의 인격성을 점령한 영(spirit)이 세나의 인격을 장악한 시간인 것 같아. 세나의 육체가 보이지만 그 안을 지배한 영의 실체는 세나가 아닐 수 있어.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속지 말고 그 안에 다른 영적 존재를 대면하자. 인격에게 얘기하듯 하지 말고 명령해야겠다. 사정하거나 약해지지도 말자. 인격을 대하듯 대화하지 말자.'는 것이었어요.
공동체에서 항상 부드럽게 말하고 상냥한 태도를 유지해 왔던 제 이미지가 망쳐지더라도 시도해야 했어요. 그 시도가 만약 실패한다면 저만의 신념이었으니까 그 이후 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가 될지 예상할 수조차 없었어요. 실천하는 것도 실천 이후 문제 해결에 대한 확신또한 없었어요. 어려운 결정이었어요.
그렇다고 다른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저는 그런 명령조로 계속해서 한 인격체를 대한 적은 없었어요. 친동생들과의 관계에서는 서로 싸울 때나 일시적으로 명령하거나 화풀이 격으로 내뱉어 봤지만요.
그러다 보니, 모스크바도 넓고 공동체의 일원들도 수백 명이었지만 당시에는 오직 세나와 저 혼자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조금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세나가 아니라, 세나를 점령한 나쁜 영적 존재와 저! 이렇게 둘만 존재하는 세상과 시간이었죠.
차라리 세나가 쓰러진 것처럼 저도 똑같이 쓰러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어요.
지금도 그 시간을 떠올리다 보니, 온몸에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에요.
저의 아이디어는 감사하게도 문제 해결책이 되어주었어요. 세나에게 명령하기 시작하자 멋대로 하던 세나의 행동만은 멈췄어요. 오직 제가 명령할 때만요. 다른 이들에게는 여전히 요란스럽게 반응했어요.
저도 공동체의 일원일 뿐인데 이 문제를 다뤄야 하는 사람이 왜 나여야 하냐고? 항변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어떻게 버티고 있었는지... 지나왔으니까 지났나 보다 싶어요.
정리하자면, 과정 중에 제가 얻은 지혜예요.
'내적 전쟁'중에는 '내적 음성'을 잘 구분하여 듣고 따르라는 것.
내적 음성의 인도가 설사 현재 자신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어리석어 보일 지라도.
상황을 돌파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고 공감하지 않는 방법을 실천 중이어서, 무척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지나고 있을 지라도 믿음을 잃지 않으셨으면 해요.
혼자만의 전쟁 끝에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승리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놓지 않으시길 바라요.
선생님이나 저나 승리를 얻은 후에는 혼자가 아니거든요. 사랑가운데 버티는 시간이니까요.
당시 이기자 목사님 개인적 상황에도 비슷한 전쟁을 치르고 계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안을 전합니다. 이기자 목사님
경애야 겨울이다. 잘 지내니?
ㅎㅎ 경애 생각하자마자 보름달 같은 네 얼굴부터 떠오른다.
만나기만 하면, "선생님 식사는 하셨어요?"라고 묻던 네 표정이 떠올라. 편의점에서 일하던 너를 만나던 시기에는 나는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느라 알바 정도의 급여를 받고 있었지.
그래서 내 주머니 사정이 너의 주머니 사정보다 좋지 않을 때도 있었고 말이야. 오히려 경애가 나를 도와주는 상황도 생겼는데, 그때마다 통통한 볼에 보조개가 들어가는 미소로 반응해 주어서 고마웠어.
유효기간 바로 지난 삼각김밥이나 도시락을 나에게도 주려고 매 번 물어봐 주던 우리 경애.
경애가 선생님보다 부자로서 베풀 수 있는 너의 벌이는 편의점 알바였는데 계산대 앞에 서있던 네 모습 아직도 눈에 선하다. ㅎㅎ
글 쓰는 김에 아무리 오래간만이지만 방금 너에게 통화를 시도했더니 네가 받아서 더 반가웠어. 근 10년 만에 연락을 하는 데도 연락이 닿는 경애는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 좋은 학생이야. 선생님이 입는 패션은 본인께는 너무 후지다고 말하면서 활짝 웃던 너. 그 때나 지금이나 선생님 생각은 다르다.
"빠션을 모르는 경애야 쌤 옷 좀 잘 입는데... 후지긴..." ㅎㅎ 그때처럼 장난치고 싶다.
그때부터 너는 듬직한 아이였는데, 통화 목소리가 좋지 않아서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또 신뢰가 돼. 너는 선생님보다 더 강인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거든. 너무 곧고 융통성이 없는 경애랑 대화하다 보면, 너와의 대화가 친자매들의 논쟁처럼 변하기도 했는데 말이야.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 말이 백 번 맞지 않냐?
멀쩡한 집(탈북학생들을 위한 학교) 놔두고 서울이 어떤 곳인지도 다 모르면서, 집을 나가겠다고 고집스럽게 비현실적인 계획을 세웠잖아. 그런 너에게 "좋은 생각이다 잘 해낼 거야! 네 인생이니까 네가 결정대로 해 봐."라고 무작정 응원만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아.
경애야 그런데 이제 얘기할게. 그때 네 모습이 내 모습이기도 했어. 너는 용돈도 주고 숙소와 교육을 제공해 주는 너의 집을 떠나려고 했잖아. 나 또한 너처럼 나의 공동체를 떠나려는 꿍꿍이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지. 15년 넘게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니, 진정한 가족 관계처럼 서로의 허물까지 굉장히 많은 걸 보고 경험하게 되잖아.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은데, 공동체 리더들의 모습이나 나의 친아버지나 달라 보이는 게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의 또 다른 15년 그것도 청춘을 다시 빼앗긴 기분이 들었어. 집에서 자라면서 20년은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고, 아버지 다음으로 만난 리더들에게 또 아버지에게 순종하듯 순종해 왔으니까. 또 다른 15년은 다른 아버지들을 위해 산 것 같다는 생각이 밀려오자 정말 기가 막히고 힘들어지더라고.
그래서 경애 너를 만났나 봐. 경애 너도 살기 위해 죽음을 담보로 북한을 탈출했고, 중국에서 숨 막힐 듯 갇혀서 수년을 보냈고 결국 갈망대로 서울에 도착은 했겠지. 하지만 완전한 자유를 누리기에는 훈련되지 않는 경애 너 자신만 보게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다 경애 너에 비해 철없는 남동생이 걱정되기도 했고 말이야.
경애 네가 당시 같이 생활하는 친구들과도 처지만 유사할 뿐, 너무 달랐잖아.
동료가 아니라 모두가 철저하게 이방인처럼 느껴졌을 거라 짐작해.
경애야 너를 뜯어말리면서 결국 그 말들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어.
"가긴 어딜 가냐? 네가 세상을 아냐? 여기가 최고의 환경이야. 밖에 나가면 천국일 거 같아? 먼저 너 자신부터 더욱 강인하게 바꾸고 나서 떠나. 그때가 떠날 시기야. 선생님이 도와주는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도 가고, 지금보다 더 좋은 일자리도 찾고. 그다음에 독립해도 늦지 않아. 아니 그때가 바로 적당한 시간이야."
경애 덕분에 선생님은 여전히 공동체에 속해 있다. 신도시에 있는 새로운 공동체이긴 하지만 말이야.
여기 와서는 매일 평안해. 경애를 만나던 방배동에 비해 소박하고 사랑이 많은 곳이야.
경애도 더 깊은 사랑가운데 생활하길 바래.
통화 중에 듣자니 감기 걸린 것 같던데, 따스한 음료 마시면서 건강도 회복하고.
새해에는 맛있는 밥 같이 먹자.
보조개 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