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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철 Jun 14. 2021

방랑의 여정-잊혀진 시간


여기 하늘을 여는 문이 있다.

   

카페 정원 한가운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놓여 있다. 계단에 올라서면 커다란 액자가 우뚝 서 있다. 액자는 텅 비어 있다, 그저 빈 곳, 허공을 배경으로 하는 액자이다. 빈 곳은 하늘의 색. 오늘따라 파란 물감을 한 점의 오차도 없이 오롯이 비추고 있다. 그 액자가 바로 하늘의 문이다. 카페 이름은 ‘ORDA’, 발음대로 읽어보니 ‘오르다’이다.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카페 이름이다. 카페는 성산 일출봉을 지척에 둔 해변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 시간 전쯤 나는 카페 앞 정원에 있는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커피 한 잔에 마음은 그저 텅 빈 공간이 된다. 커피를 마시고 오르다 하늘을 여는 계단 앞에 섰다. 대여섯 계단을 오르면 바로 하늘이다. 누가 푸른색 도화지를 붙여 놓은 것 같다. 액자를 통해 푸른 하늘이면서 텅 비어 있는 공간을 그저 바라만보았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오직 하나 하늘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같다는 생각만 든다. 이곳의 액자는 하늘로 통하는 문, 즉 경계라는 생각도 든다. 하늘과 땅, 현실과 꿈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어우러지는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성산 일출봉에는 항상 바람이 분다. 나는 바람을 안고 걷는다,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5월의 꽃길, 군데군데 무리 지어 피어있는 노란색, 분홍색의 야생화가 그 조그만 꽃잎을 갸웃거리는 언덕길을 따라 걷는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따가운 햇볕은 더 내게 부담스럽지 않다. 바람, 햇살, 그리고 야생화가 내가 걷는 길의 동반자이다.


해변의 언덕길을 걷는다, 야생화와 함께하는 방랑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시간과 함께하는 방랑의 길 말이다. 햇살과 조그만 꽃이 세찬 바람에 일렁이는 해변 위의 언덕길을 걷는다. 언덕 밑 해변에는 바위에 부딪히는 하얀 포말이 힘차게 뛰어오르고, 멀리 바다 저 멀리 하늘은 그저 푸르다. 가다가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걷는다, 지금 나는 어디를 걷는 것일까? 그러기를 여러 번, 문득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흑백 사진처럼 명확하게 떠오르는 생각, 1970년대 말 서울에서 내한 공연을 했던 상송 가수 아다모가 갑자기 소환된다. 당시 공연 포스터가 허공에 펼쳐진다. 덩달아 눈이 내리던 어느 추운 겨울날 아다모가 세종회관에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상상 속으로 다가온다. 나는 공연장을 찾지는 않았다. 공연을 볼 형편이 전혀 되지 않던 시간이었으니. 그해 겨울 그의 대표적인 노래 ‘눈이 내리네’를 테이프를 통해 한없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오늘 그 예전의 기억이 또렷이 등장했다, 시간의 경계가 과거에서 현재로 그대로 무너진 것이다.

이처럼 따뜻한 봄날에 갑자기 그해 추운 계절의 풍경이 사진처럼 오버랩 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까 떠나온 오르다 카페 정원에는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정원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덩굴 의자들이 바로 그것이다. 수년 전에 한겨울에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눈보라에 이리저리 뒹구는 의자 들 사이로 한참 동안 서 있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나는 뭔가 놀라운 일을 당한 아이처럼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뭔가 강렬한 이미지가 나를 사로잡았다. 뒹구는 것은 덩굴의자뿐만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이 함께 어우러지는 곳이었디. 여기저기 던져진 덩굴 의자가 시간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곳은 우주의 시간이 정지된 곳이었다,    


로마 시대를 그린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의 한 장면을 떠올랐다. 로마의 장군 막시무스가 멍한 얼굴로 처참히 뭉개진 자신의 집 입구에 서 있다, 미국 남북전쟁시절을 시간적 배경으로하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이 들판속을 폭풍우 속에서 헤매다가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얼굴도 보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소년시절로 돌아와 그해 겨울 내내 들었던 ‘눈이 내리네’를 다시 듣는다. 눈이 내린다. 내 눈앞에 소복소속 쌓인다. 나는 분명 야생화 만발한 꽃길을 걷고 있는데 눈은 하염없이 내 눈앞에서 흩날린다.  

성산일출봉을 지나 광치기 해변에 들어선다. 해변에 펼쳐져 있는 백사장은 온통 눈밭이다. 나는 눈밭 광원을 걷는다. 눈밭에 발이 푹푹 빠진다. 힘이 든다.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긴다. 

눈은 쌓이고, 내 마음도 눈으로 온통 덮인다. 후두로 얼굴을 깊게 덮어씌웠지만, 눈은 그 속을 뚫고 들어와 얼굴을 후빈다.


이제 광치기 해변을 벗어나 섭지코지를 향한다. 섭지코지를 두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물새 한 마리 외로이 떠 있는 바다를 보며 걸었다. 물새도 한 마리 걷는 사람도 한사람이다. 지금 이 시간에,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을 뚜벅 뚜벅 걸었다.     



섭지코지 정상에 자리한 건물, 2층에 자리한 ‘민트’라는 레스토랑에 앉는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서 사람이 별로 없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점점 어두워지는 바다를 보면서 커피를 마신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먹은 게 없다, 성산 일출봉의 ‘오르다’ 카페에서 마신 커피와 이곳 민트에서 마시는 커피, 두 잔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허기가 몰려든다, 식사시간 전이라도 주문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스파게티를 주문한다. 


식사시간까지는 30여 분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유리창을 통해 밖을 본다. 유리창 밖에는 한 소년이 서 있다,  

아다모가 서울에서 첫 번째 내한 공연을 할 시간에 나는 친구를 만나러 군산 시내를 나갔다. 눈이 쌓이던 추운 겨울날이다.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내 옷차림에 놀란 것이다. 가벼운 티셔츠에 눈 속에 파묻히는 슬리퍼를 신었기 때문이다,  


“이 날씨에 맨발이라니 ―-”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날따라 엄지발가락이 삐죽이 나오는 양말밖에 없었고, 운동화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는 말을 굳이 해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슬며시 미소 지어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친구 역시 웃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결이 다른 미소라는 것을 안다. 


창밖에는 소년이 서 있다. 슬리퍼에 맨발인 소년의 머리에는 눈이 쌓여 있다. 소년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다. 잊으려 했지만 절대 잊히지 않던 미소 짓는 소년의 초라한 모습이다. 그해 겨울날 이후 나는 초라하지 않기로 했다. 초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그날의 모습은 잊기로 했다. 아예 기억 속에서 지우려 했다. 그 시절의 기억을 내 시간 속에서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대학을 가고 군대를 마치고 직장에 취직하면서 줄곧 모토로 삼은 것은 ‘초라하지 말자’였다. 허나 난 마음속으로 알았다, 초라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욱 초라해진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고 있는 삶과는 달리 나는 내면적으로 삶은 풍성과 반대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극은 반대 극을 부르는 게 삶의 이치이거늘, 나는 애써 그 이치를 무시하려 했다. 레스토랑 창가에서 나를 향해 슬며시 웃음 짓는 맨발의 소년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 역시 소년을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의 시공간에 우리 둘은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배가 고프다는 나의 말에 직원이 식사 시작 전에 스파게티를 내온 것이다, 허나 나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아니 먹을 수가 없었다. 그저 바라만 봤다, 그해 겨울날 소년은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했다는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무도 잔인한 기억이다.


자, 자, 돌려 생각 하자구나. 한 번만이라도 다시 생각해보자꾸나. 흥분하는 나를 달랬다. 심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과거의 기억은 끝나버린 것이 아니다. 이미 겪었다고 해서 과거의 시간이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하나로 열려있다. 과거는 단절이 아니다. 미래 역시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진실한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 세계의 시간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과거를 현재의 시간 속으로 들여놓는 것은 삶을 빈곤이 아닌 풍성하게 만드는 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상기’라고 했다, 과거는 이제는 다룰 수 없는 무거운 짐이 아니다.  상기의 힘은 단순히 지나간 것에 대한 기억이 아니다. 현재적인 것을 다시 불러일으켜 생생하게 의식시키는 힘이다. 상기의 힘으로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가 현재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상기의 힘을 통해 시간은 더 무의미하게 분산되지 않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카뮈의 말대로라면 상기는 위대한 순간이다. 카뮈는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을 위대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나의 삶이 여러 가지 면에서 빈약했던 것은 시간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시간을 자르고 가두고 누르려 했다. 과거를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그리고 미래를 보지 못했다. 나는 이제 이 순간을 살지 않으련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은 버린다. 아무리 빈약한 과거라도 상기하고 미래와 어우러지는 ‘지금 이 순간’을 가슴에 꼭 안아야 할 것이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축으로, 그리고 시간을 압축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방랑의 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창가로 눈을 돌리며 한 단어씩 천천히 읊조렸다. 처절히 찢긴 과거를 품에 꼭 안은 비장한 절규이다. 소년이 내게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창가에 바짝 다가건 소년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창가의 문을 열어젖힌다, 한 면이 온통 통유리이지만 나는 힘차게 창문을 열 수 있다. 그것은 하늘로 통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난 과거와 현재를 무너뜨리는 하늘의 문은 오전에 방문한 ‘오르다’ 카페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년이 조금 더 활짝 웃었으면 좋겠다. 목이 멘 나는 소년 앞으로 스파게티를 돌려놓았다,


“소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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