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영 혼밥 찬양가
내향인의 필수 시간은 혼자 있는 시간이다. 내향인이라고 사람이 좋지 않은 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어울리고 얘기하고 맞장구치고 그런 시간도 필요하다. 하지만 내향인은 사람과 만났으면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혼자 보내야 한다. 그래야 채워진다.
대학 시절, 집 근처에 영화관이 있었다. 근처라기엔 조금 멀고, 멀다 하기엔 조금 가깝고. 빨리 걸어 20분 천천히 걸어 30분쯤 되는 거리였던 것 같다. 나는 그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조조 아니면 밤 중에 자주 보았는데 아침보다는 밤이 좋았다. 혼자 영화를 보고 나오면 시끌벅적한 세상이 한층 얌전해져 있었다. 번화가를 재빨리 벗어나면 가로등과 네온사인과 간간히 다니는 차량 불빛이 조화롭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혼자 아주 천천히 집에 걸어오며 영화를 되씹어보는 시간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데이트를 한다고, 혹은 친구나 다른 지인과 사회생활을 한다고 같이 영화를 보는 일은 혼자 보는 일보다 훨씬 복잡하다. 우선 취향에 맞는 영화를 골라야 한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우선이 아니라 같이 볼만한 영화를 골라야 하는데 거기에는 성별, 나이, 우리의 관계, 우리의 관심사등 수많은 고려요소들이 있다. 주로 나보다 상대의 관심사를 살피는데 상대가 "나는 아무거나 괜찮아"라고 말해도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 "이런 걸 돈 주고 보냐"라든가 "네 취향이 이런 거였어?"라든가 분명 뒷말이 나온다. 그때 가장 흥행하는 영화 중 같이 봐도 부담스럽지 않은 덜 선정적이고 덜 폭력적이며 약간의 코믹이 있고 액션이 있으면 더 좋으며 때론 로맨스도 같이 있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이런 짬뽕(?) 영화가 대중적으로 인기 있다는 건 좀 나중에 깨달았다.
같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같이 밥을 먹든가 차를 마시든가 하면서 영화의 평을 나누는 시간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나는 정말 재미있게 본 영화를 상대방이 깎아내리면 나의 감흥이 팍 식어버리고, 나의 감상을 얘기하는데 "뭘 영화 보는데 그렇게까지 생각해" 또는 "나는 아무 생각 없는데" 하면 나의 감상은 거기서 끊기고 만다. 나의 영화 관람은 뒷 감상까지 포함인데 이렇게 흐름이 끊기면 나는 반쪽짜리 영화를 본 것만 같다.
반대로 취향이 맞는 사람과 같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낸다. 같은 장면에서 같은 생각을 떠올리기도 하고 혹은 다른 생각을 공유하며 "어머어머 너는 그렇게 봤어?" 하면서 맞장구치는 순간 엔도르핀이 치솟는다. 감정의 일치는 짜릿하다. 특히 마이너 한 영화를 볼 때 그 특유의 감성을 이해하는 영화 파트너를 만나면 이 사람에게는 나의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일체감이 든다.
하지만 이런 일은 드물고, 타인의 영화 취향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영화를 같이 보는 것은 너무 리스크가 크다. 그냥 영화 중간에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나 혼자 영화에 깊이 몰입하여 영화관 불이 켜지는 순간 몰입에서 빠져나오고 혼자 집에 걸어가며 장면장면 생각해 보는 게 가장 무난하다.
혼밥도 비슷하다. 다른 사람의 입맛을 고려해 메뉴를 정하고, 내가 맛있어도 식사 파트너가 "이거 맛없다"해버리면 입맛 뚝 떨어지고, 메뉴를 공유하면 내가 먹는 양이 적절한지 상대방은 맛있게 먹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무엇보다 입안에서 음식을 씹으며 적절한 스몰토크를 이어간다는 게 쉽지 않다. 너무 진지한 이야기는 밥 먹기가 어렵고 너무 가벼운 이야기는 금방 끝나니 그 중간 어드메쯤으로 음식물 씹는 중간중간을 채워야 한다. 혼밥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음식을, 원하는 만큼 먹으며 혼자 마음껏 생각 또는 상상할 수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의식주 중 '식'을 자유롭게 누린다는 것은 매일 얻을 수 있는 소확행이다.
이런 사회 부적응자 같은 나에게도 고맙게도 같이 영화 봐주고 밥 먹어주는 친구가 있다. 히키코모리에서 구출해 주는 고마운 친구들이다. 오랜 시간 봐 와 서로의 취향을 잘 알고 마음을 나누는 게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내가 오늘 또 새로운 사람과 밥을 먹는다면, 그건 십 년 후 이 사람과 감정을 공유할 만큼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혼밥 혼영을 찬양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오래 봐 온 사람이다. 몇 되지 않는 나의 소중한 친구들, 지인들. 놓치지 않을 거야.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