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부갈등. 부부갈등의 서막
양가 부모님들의 도움 없이, 오롯하게 아이들의 엄마가 되기로, 그렇게 한 가정의 진정한 살림꾼이자 '엄마'가 되기로 뒤늦게 굳은 결심을 했지만, 살림과 육아는 그리 쉽지 않았다. 차라리 공부가 더 쉽고 , 나가서 돈을 버는 직장이 더 쉽다 매일매일 느낄 정도로 너무너무 힘들고 그 자리에 앉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던 기억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게다가 셋째가 바로 생겼다.
어쩌자고 연년생으로 곧바로 셋째가 생겼는지 모를 일이지만, 내심 오빠가 죽고 너무나도 외로운 외동딸로 홀로 커왔던 내 무의식에서는 아이들의 외로움을 가장 두려워하고, 그저 가정의 북적북적함을 바라고 있었던 듯 보인다. 이유야 어쨌건 간에, 4살 첫째, 갓 돌 지난 둘째에 이어 막내가 태어났다.
그때부터, 그야말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살림을 안 해봤던 나는, 시금치 하나를 무치는 일도 그리 쉽지 않았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무치는 방법을 보고서는 집안의 온갖 살림이 다 끌려 나왔다. 맞다 싶어 꺼낸 냄비는 물이 끓고 시금치를 넣으면서 끓어 넘쳤고, 나는 황급히 큰 냄비로 내용물과 물을 다시 붓고 젓가락으로 휘젓다가 집게로 꺼냈다가 결국 채반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한 줌의 시금치를 무쳐내는데도 온 살림이 동원되어 설거지 거리가 싱크대에 넘쳐흘렀다.
부추 양파 무침을 만드는데도 이상했다. 분명 나는 간을 제대로 한 것 같은데 맛이 제대로 나지 않고, 신랑이 올 저녁때쯤이면 부추는 시들어 죽기 직전 식물처럼 비실비실해졌다. 게다가 이상하게 맛은 소금과 설탕은 다 어디로 갔는지 맹맹한 맛이 나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이러지??
청소나 빨래 또한 하등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처럼 느껴졌고, 그 와중에 아이들은 쉴 새 없이 깨서 울어댔다. 내 몸이 힘들고 내 맘이 힘든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사이렌처럼 울려대는 갓난아기를 둘러업고 애원하며 방바닥에 앉아 엉엉 울면서 한 없는 무기력감을 느꼈다.
전국 모의고사 상위 1% , 전국 불어 경시대회 은상, 고 3 내내 특수 고등학교에서 반 1등.
대학교도 꽤 괜찮은 곳 가서 장학금 받고 공부하고, 대기업 외국계 기업 들어가서 영어로 쏼라 쏼라 외국인들만 상대하던 나였다. 하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속수무책, 나는 그저 무능력하고 살림 못하고 육아를 잘 못해서 쩔쩔매는 그냥 초보 엄마에 불과했다. 그 무기력함이란, 가끔은 내 능력치와 도를 넘는 것이어서 살림을 하면서 빨래를 동시에 돌리고 청소를 하다가 아이가 울면 화들짝 놀래서 분유를 급히 타서 달려갔다. 늘어진 펑크 난 티셔츠에 머리는 똥머리에 일어나 세수도 못하고 초췌하게 가슴팍에 밥풀을 잔뜩 묻힌 채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나도 너무 힘든데 좀 봐주면 안 되니??
문득 거울을 봤다.
예쁘게 단장하고 멋진 백을 들고,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출근하던 내 커리어우먼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밥풀을 더덕더덕 묻히고 얼굴은 시커멓게 썩은 듯, 잠 못 자 푸석한 얼굴에 병든 것 같은 아줌마 같은 여자라고 할 수도 없는 그저 '자두 엄마'가 거기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가 이러려고 회사를 그만두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았나?
왜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 이렇게 힘든 거지?
왜 나는 잠을 한시도 잘 수가 없는 거지.. 왜 아이들은 잠을 이렇게 자주 깨는 거지?
왜 2시간마다 먹는 걸까. 왜 이렇게 피곤하기만 한 걸까.
왜... 왜... 살림은 이렇게 힘들고 티가 안나는 거지?
그러던 찰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복직해 달라고.
아직 막내가 돌이 안된 어린 나이지만, 돈이 아쉽고 나의 지위가 아쉬웠던 나는 굉장히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직장을 나가지 않고 육아휴직 수당만 받아서 생활하다 보니 아무래도 내가 돈 쓰기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눈치가 보이던 찰나였다.
게다가, 서울에 집을 빚을 지고 산 터라 장기적으로도 경제적으로 내가 보태야 뭔가 수지타산이 맞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적으로 돈만 두고 보자면..
일단 , 국내 가장 큰 대기업 중 하나, 해외 사업 관리부의 파트장으로 일하고 있던 좋은 포지션이었다. 팀장도 내 편이라 아마도 아이들 때문에 휴가를 내거나 하면 잘 봐주실 것 같았다. 나는 곧장 복직에 가능성을 두고 여기저기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단, 아직 너무 어린 세 아이들을 아침에 준비시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각기 보내주실 도우미가 필요했다. 법적으로 알아보니, 두 명까지는 도우미 한 명이 볼 수 있지만, 세 명은 무리라서 도우미 두 명을 써야 한다고 했다. 비용적으로 너무 부담이 되어 동네 나이 드신 어르신 중에 조금 살뜰하게 봐주실 수 있는 분이 있는지 찾아봤다.
아침 하루 2시간 봐주는데 아이 셋은 70-80만 원. 오후 내가 퇴근해서 돌아올 때까지 아이 셋을 봐주는데 또 80-120만 원이 들었다. 생활비, 음식 마련 비용 등은 모두 내가 해야 했으므로 시간이 없는 나는 보통 사거나 돈으로 해결할 것이었다. 결국 내 월급은 모이는 것 없이 다 나가야 했다. 플러스, 아직 어린아이들은 하루 종일 엄마 없이 지내야 했다. 그걸 각오하고서라도, 아직 어린이집 대기 중이라 복직 후 한 달여간은 막내가 머물 곳이 없었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지방에 계신 시어머니께 도움을 요청해 보기로 했다.
그래, 내가 봐주게. 내가 올라가게.
한 달이 아니라, 내가 봐주게.
어머니는 바라고 기다리셨다는 듯이 너무 흔쾌하게 내가 봐주마 하셨다. 형님에게까지 전화가 와서 엄마가 올라가고 싶어서 난리가 났다고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아이는 시댁에 맡기고 일을 나가라고. 아이들은 시어머니께 맡기고 일 나가서 돈을 벌라고.
그때, 난, 갑자기 무서워졌다.
아.. 내가 실수했구나.
돈은 결국 문제가 아니었다. 내 월급은 모이지 않을 것이었다.
아이들 봐주는 비용으로 어머님께 용돈을 드리고,
살림을 내가 하는 대신 시중에 반찬을 사고,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예쁜 옷이나 신발, 장난감을 사주고,
내 품위 유지비라도 쓰면 내 월급보다 돈이 더 나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아직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 셋이, 거의 엄마를 보지 못하고 할머니나 어린이집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원했느냐였는데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들의 '엄마'로서 시간을 보내고, 그 경험을 원했다.
비록 돈이 없고, 밥풀을 앞치마에 옷에 붙이고, 머리는 산발인 초라한 여자이더라도
내 아이 oo, qq, ee의 엄마의 품으로 남아보길 원했다.
아이들이 힘들 때, 곧장 달려와 안길 수 있는 base camp로서 남는 경험을 원했다.
그렇다면, 복직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신랑과 상의 후, 복직하지 않고 '익명의 여자'로 남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 후, 나는 다시 그 익숙하지 않은 살림의 세계로, 육아의 세계로 돌아갔다.
앞치마를 입고, 머리는 항상 부스스하게 똥머리를 하고, 목이 늘어진 편한 티셔츠에 밥풀과 김칫국물을 묻히고 , 내 이름이 아닌 다른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oo 엄마.
안녕하세요 , oo 어머니~
하이요 , oo 맘 ~
xx 어머니 되시죠?
안녕하세요 어머니~
ww 엄마 안녕하세요??
동네에서 나는 아이 셋 이름 + 엄마로 불렸다. 그 와중에 내 이름은 잊었고, 내 나이를 잊어갔다.
그리고, 혼자 바득바득 자신의 도움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겠다고 결심한 나를 향한 시어머니의 묘한 신경전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친정 부모에 이어, 독립에 걸림돌인 더 큰 제2 라운드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의 집과 삶'에 예전보다 더 간섭하고 싶고, 아들 옆에서 살면서 손주들을 보고 싶고 직접 키워보고 싶은 시어머니, 그리하여 며느리의 살림에 간섭하고 자꾸 관여하고 싶은,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친하게는 지내야 하는 그 묘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피 말리는 신경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혼자 하겠다고 다짐한 그날부터, 그 계획을 눈치채신 듯하게 살림에 대한 간섭이 심해지시고 올라와서 아들 집에 지내실 때조차 전과는 달리 잔소리가 심해지면서 며느리를 '보모' 정도로 대하시는 기운을 너무 명확히 느낄 수 있었는데, 잔소리보다 묘한 그 신경전이 참기가 너무 힘들어진 며느리는 이제 시어머니가 자신의 집에 오는 것이 너무 싫어졌다.
애들 밥차리라! 벌써 9시다.
애들 배고프다.
눈을 비비고 나오는 며느리에게 인사 대신 먼저 외치셨고,
이거 빨리 드라이클리닝 갖다 맡기라~!
아이를 안고 쩔쩔 매고 있는 며느리에게 차갑게 말씀하셨다.
내일 아이들 어린이집도 안 가는데 푹 낮잠 재우라~
아이들은 안 가도, 낮잠을 자면 밤잠을 안 자서 엄마를 괴롭힐 아이들이었지만, 시어머니 안중에 며느리의 밤잠 같은 건 없었고,
그 책들 다 치우고, 애들 옷 정리해라. 책장에 착착착
셋째를 낳고도 틈내서 심리학 전공 공부를 하고 있던 내게 , 그 책들을 치우라 말씀하셨다.
문제는, 아들이 오면 그 같이 있는 자리에서는 이상하게 아들보다 며느리를 살뜰히 챙기셨다.
네가 젤 중요하다, 네가 잘 먹어야 된다.
라시며 며느리 숟가락 위에 고기를 얹어주셨다. 아들 보는 앞에서.
그런데, 아침에 둘이 있을 때는 분명히
우리는 아무거나 먹자. 김치만 내온나.
라고 다른 반찬을 꺼내지 못하게 해서 며느리를 속상하게 하셨던 어머니였다.
며느리는 점점 시어머니 앞에서 말을 잃어갔다. 그럴수록 시어머니는 더 은밀하게 차갑게 대하시는 것 같았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는 또 예전처럼 여전히 다정했다.
'아들이 있을 때와 없을 때' , 시어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태도인 그 괴리는 점점 커져갔다.
어느 날, 급기야 남편에게 터지고야 말았다.
나, 이제 어머니 불편해.
우리 집에 못 올라오시게 해.
내가 애들 볼게.
노골적으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신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간 나와 시어머니 사이에 쌓인 이야기는 듣지도 않으려 했다.
물론, 이야기할 생각도 없긴 했다. 누가 자기 엄마 싫다고 하는데 좋아라 할까.
다만, 원했던 것은 그 마음에 대한 이해였을 뿐이었다. 못하는 살림과 육아에 뛰어들어 ,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아이 셋을 키우는 것도 너무 나도 힘든데, 시어머니와의 간섭을 받으며 묘하디 묘한 신경전까지 치르려니 정신이 말라비틀어지는 것 같았다.
남편이라도 내 편이 되어, 진심으로 위로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에게 되돌아온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 우리 엄마 욕하는 거야?
우리 엄마가 괜히 그러겠어? 이유가 있겠지
그 말을 들은 아이 셋 엄마는, 정말 죽어버리는 상상을 그 자리에서 했던 것 같다.
산후 우울증이었을까, 아니면 직장 여성의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허탈감이었을까. 잠 못 자고 피로한 상태에서 잘 먹지도 못한 허약한 신체에 대한 반응이었을까. 거기에 시어머니의 존재로 내 집에서 발 뻗고 편안하게 지내지도 못하고 있던 , 미묘한 신경전으로 정신까지 허약해져 있던 그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아이 셋 엄마는, 그날 그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뛰어내렸다는 신문 기사의 여느 이상한 여자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난 뭘 위해 지금 이러고 있는 거야?
당신은 누구 남편이야? 남 편인거야? 누구 편을 드는 거야?
그날 밤, 모두가 잠든 한 밤중에, 그 여자는 밥풀이 말라붙어있는 목이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맥주캔을 들이키며 밤새 차 안에서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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