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환상을 깨는 그리스
터키 보드룸에서 배를 타고 1시간이면 코스 섬.
피곤했는지 죽은 듯이 자고 있던 나를 누군가가 깨운다. 그리스에 다 왔다며.
그리스로 입국하는 것이므로 절차를 밟아야 한다. 검사관이 묻는다.
"그리스엔 무슨 일로 오셨죠?"
여행 왔어요.
"그런데 왜 혼자 왔죠?"
혼자 여행하니까요.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같이 안 오고 왜 혼자 왔죠?"
혼자 오고 싶어서요. 전부 일 하느라고 바쁘거든요.
"그래도 왜 이렇게 멀리 혼자 여행하는 거죠?"
계속 "혼자"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이 이어지길래 귀찮아서 종료 멘트를 날렸다.
Up to me. I'm a free sprit!
드디어 그리스다.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곳. 새하얀 대리석과 신전이 있는 나라, 내가 좋아하는 신화 이야기와 신들이 살아 숨 쉬는 곳! 왠지 자유가 느껴지는 곳.
힘들 때마다 상상 속에서 도망쳤던 나라, 그리스다. 그렇게 부푼 마음으로 코스의 예쁘고 작은 항구에 도착했다.
터키와는 1시간 남짓 떨어져 있는 섬인데도,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사람들의 표정이 다르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 걸어오는 터키인들과는 달리, 무뚝뚝한 표정인 데다가 내게 관심들이 없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다르다. 관광지이다 보니 남녀가 거의 수영복 입고 길가를 활보한다.
이슬람 자미 대신 교회들이 서 있고, 꾸란 기도 소리 대신 교회 종소리가 울린다.
한 달 동안 꾸란 기도 소리에 자미 소리를 듣다가 갑자기 교회 종소리를 들으니 이상하다.
1시간 만에 다른 세계로 진입한 나는 졸다 깨서 살짝 어리벙벙했지만, 일단 따스한 햇살은 똑같다.
그리스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 숙소 구하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나를 태우고 오토바이로 질주하신다. 그러고 보니, 터키에서는 여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잘 못 본 것 같다. 치마를 걷어붙이고 오토바이를 타시는 아주머니를 보며 내가 터키를 떠나긴 떠나왔구나..라는 생각이 물씬. 그리스 여자들 좀 터프한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섭게 달리시더군.
가방을 던져놓고 부리나케 나왔다. "히포크라테스 나무"가 나를 반긴다. 의사가 될 때 하기로 유명한 히포크라테스 선서. 의사의 원조인 그가 여기 출신인가 보다?! 나무 옆 상점들에서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각국 언어로 번역해서 팔고 있었다.
아름다운 바다.
고대 요새. 들어가면 큰 요새 안에 기둥 흔적들이 저렇게 남아있다.
팔자 좋은 고양이는 사람은 신경도 안 쓰고 늘어져 자고 있고.
얼마나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밟았는지 휘어진 계단을 보니 기분이 야릇하다.
한 바퀴 휭~ 둘러보고 코스 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기 작품들은 마음을 울리는 구석이 없더라... 안탈리아에서는 정말 충격의 도가니였는데, 막상 그리스에 와서 그리스 원조 조각들을 보는데 그다지 아름답다 느껴지지 않는 건 왜지? 아마도.. 아름다운 조각들은 모두 빼앗겨 다른 나라에 퍼져 있는 게 분명하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또 알 수 없는 고대 유적지가 나온다. 큰 마을이었다고 설명에 쓰여 있다.
입장료도 없고 그냥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유적지들이 지천에 깔려 있어서 그렇겠지? 돌 위를 깡충깡충 뛰어다닐 수 있어서 좋다. (죄송)
엄청나게 큰 야자수와 엄청나게 오래된 담벼락.
난 이상하게 이런 버려진 유적지가 좋더라. 사람도 없고 한적한 것이 참 독특한 느낌.
그리스 정부에겐 미안하지만.... 완전 폴짝폴짝 돌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그런데 돌들이 좀 심하게 널브러져 있다. 이런 거 복원하면 엄청난 재산일 텐데..
터키나 그리스나 돈과 여력이 부족한가 보다.
그리스령에 떨어져서 가장 좋은 건, 밤에 나돌아 다닐 수 있다는 거다. 터키에서는 아침 일찍 나가서 하루종일 돌아다닌 후, 밤거리를 다니지 않고 해가 지기 전에 숙소에 돌아왔다. 위험할까 봐.
그리스에서는 분위기 자체가 안전하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거리를 활보하며 돌아다녔다.
아담하고 귀여운 교회. 금장 모자이크가 인상적이다.
밤 골목. 여자가 발레 하는 모습을 가게 간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참.. 예쁘더라.
가게에서는 이런 조각상들을 제조해서 팔고 있다. 넌 아르테미스, 아테나, 페르세우스 아킬레우스, 소포클레스.. 조각상 보며 이름 맞추기도 쏠쏠하게 재미있다.
터키에서 그리스로 넘어온 기념으로 내 허물도 벗고 변신해야지.
터키에서 내내 입었던 무거운 옷을 벗어버리고, 시장에서 가벼운 옷과 모자를 사 썼다.
햇빛이 뜨거워 선글라스로는 버티기가 힘들다.. 사고 보니 옷도 모자도 그리스의 상징인 파란색이네.
그리고 도보로 코스 섬 탐색 시작.
예쁘고 귀여운 건물.
산토리니를 연상케 하는 파란 지붕의 교회.
길 한가운데 묶여 있는 소.
관광 기차.
여기저기를 거쳐 무작정 걷다 보니, 또 historical site 가 나온다. 정말 깜짝 놀랐다. 입구도 없이 그냥 오픈되어 있다.
들어가 보니 고대 유적임에 분명한, 아주 소중해 보이는 모자이크 바닥 위에 흙이 쌓여 있었다..
흙을 털어내면 예쁜 모자이크가 막 나온다.. 발굴하다가 웬일인지 중단한 듯?
옛날 신전터. 기둥들이 즐비하게 남아있고..
둥근 아치형 통로도 아직 건재하게 남아있다.
2층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나사 모양 계단이 일부 남아있다.. 무슨 건물이었을까?
마차들이 다닌 자국이 도로에 선명하게 나 있다. 이런 거 보면 또 기분이 야릇해진다.
아주 소중해 보이는 바닥 모자이크들이 이렇게 막 버려져 있다니..
참 신선하긴 한데, 유적지들이 너무 버려져 있어서 안타까웠다.
나 같이 유적 만져보고 밟아보길 좋아하는 관광객이야 뭐, 이런 곳을 껑충껑충 제지 없이 뛰어다니는 게 좋다만... 엄청 팔딱팔딱 뛰어다니다가 그다음 행선지를 향해 출발했다.
코스 섬은 그리 오래 머물 곳은 아니었다.
꿈의 섬 산토리니로 간다.
오후에 출발해서 새벽에 산토리니에 떨어지는 배 일정이라서, 배 안에서 멋진 일몰을 만끽하면서.
밤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고 잠자느라 바빠서 잘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렇게 멋질 수가!
산토리니에는 저렴한 숙소라도 모두 수영장이 있어서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런데 뭔가 내가 바라던 곳은 아니었다. 뭔가 허전한 것이.... 그냥 관광지 껍데기만 남아있는 풍경이랄까.
전망은 끝내주게 좋은데, 이 허전한 느낌은 뭘까...
아름다운 이아 마을을 방문해서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면서 강한 외로움에 휩싸여 버렸다... 아.. 외롭다.
마을 전체가 사람 사는 곳이 아닌, 그저 관광객을 위한 곳.
산토리니 하면 떠오르는 흰 집과 파란 지붕. 정말 예쁘긴 한데, 왠지 엽서나 그림이 더 예쁘다....
초호화 리조트들이 절경을 끼고 자리해 있다. 그런데, 저기 들어가 보고 싶다..라는 느낌보다는 아.. 예쁘네.. 정도?
몇 년 전인가 영화 <맘마미아>를 보면서, 지중해와 산토리니를 배경으로 결혼식에 분주한 주인공과 그 가족들이 정말 눈물 나게 부러웠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런 삶이 없었다...
사람의 삶이 있는 곳이 아닌, 머물다 곧 떠나야 하는 곳.
나는 '사진 잘 나오는 곳' 보다, '살고 싶은 곳'을 좋아한다..
그리고 내가 외로움을 느꼈던 이유.. 산토리니는 신혼부부들의 낙원이다. 예쁜 사진을 남기고, 서로 낭만을 즐기기에 최고.
이런 사진 & 비디오 서비스가 성행하는 곳을 내가 대담하게도 혼자 왔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외롭지.. ㅠ
알록달록 예쁜 마을들을 보면서 감정이 무뎌졌나 싶게.. 별로네..라고 중얼거리면서 다녔던 건, 내가 외로워서였을까?
곱게 화장하고 예쁜 사진을 찍는 새내기 부부들을 보고 있다 보니.. 나도 언젠가는 결혼하고 신혼여행이라는 걸 갈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생각도 들기까지 한 곳.. 만약 간다면 산토리니는 아니다.. 싶었다.
상수형이랑 같이 왔으면 재밌게 사진 찍으며 놀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ㅠ 하지만 지금은 완전 혼자.
처절하게 외로운 마음을 부여잡고 숙소로 돌아와 수영장에서 노닥거리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역시 난 물을 좋아해..
빨리 떠나야겠다.. 산토리니는 혼자 있을 곳이 못되구나.. 특히 솔로는 혼자 오면 정말 외로운 곳이구나...
안 그래도 가슴이 휑한데, 아주 대포를 가슴에 쏜다. 뻥~ 구멍 나게끔...
바로 아테네 근처 피레우스 항구로 출항하는 티켓을 끊었다.
산토리니.. 많은 걸 보진 못했지만, 뭔가 가식적인 섬이라는 느낌.
그리스인들이 포장과 광고를 잘하는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는... -_- (나 왜 이렇게 혹평을..)
역사 깊은 그리스 아테네는 어떨까. 기대를 안고 꿈의 도시로 다시 한번 출항한다.
배 갑판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는 기분은.. 정말 최고다.
기분 좋아서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며 갑판 벤치에 드러누워 뒹굴 뒹굴.
지나가던 사람이 사진기 있냐면서 찍어줌. 내가 웃겼나 봐?
그리스 국기는 참으로 예쁘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 색깔 흰색 + 파란색 조화는 정말.. 최고.
하지만 나는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사진 찍기용 도시보다는, 삶이 살아 숨 쉬는 곳이 좋다.
아테네가 그런 곳이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