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녀 갈등의 시작 , 든든한 내 편 남편
신기하게도,
내가 없는 자리에는 누군가가 꼭 들어선다.
내가 경계를 세우지 못하면, 나는 지워진다.
그렇게 제일 먼저,
없어진 나를 대신해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친정 엄마였다.
엄마는 나를 일부로 밀어내려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내가 비워둔 내 자리를
그녀의 존재감으로 채워 넣으로 했을 뿐이다.
지쳐 있는 나를 대신해서
나의 일을 대신함으로써.
나는 시간이 갈 수록 아내도, 엄마도 아닌 채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던 그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첫 아이가 찾아왔다.
거의 허니문 베이비였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직 신혼도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어리숙한 부부,
처음 사위를 맞이한 친정 부모,
첫 손주를 안게 된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랑하는 아들의 아내를 맞이한 시어머니와 시누이까지.
수많은 이해관계와 기대가 얽히면서,
우리 가정은 한순간에 거대한 욕망의 합주가 되어버렸다.
각자 자기 멜로디를 연주하며
아직 우리의 경계를 단단히 세우지 못한 채로 헤매던
나와 남편의 삶에 모두가 들어왔다.
특히 서서히 없어져 가던 ‘나’라는 역할 대체의 형태로.
그 시끄러운 오케스트라 속,
첫째 파트는 내 친정 엄마였다.
엄마는 아이를 돌보고 집안을 챙기며
자연스럽게 나의 집의 주인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아니, 내가 그 키를 엄마에게 넘긴 거나 다름 없었다.
나는 일하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골치아픈 일상 속에 일하는 현장으로 도망쳤으니까.
집에서는 너무 많은 역할들이 나를 얽매였지만
회사에서만큼은 또렷한 내 캐릭터가 있었다.
직책도 분명하고 그 이름도 멋진 ‘커리어우먼’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모두가 지지했다.
엄마도, 남편도, 시댁도.
그 ‘커리어우먼’이라는 직책 뒤에
난 꽁꽁 숨었다. 편하고 안전했으므로.
그래서 처음에는 엄마의 손길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점점 역할들이 겹치자 간섭과 통제를 넘어섰고,
급기야는 나라는 존재 자체를 지우며 밀어내는 듯했다.
“애는 이렇게 키워야 한다.”
“살림은 왜 이렇게 하니?”
“안되겠다, 너는 그냥 니 일이나 해라.
살림과 육아는 엄마가 알아서 하마“
그 말들 앞에서, 나는 점점 작아졌다.
겉으로는 내가 아이의 엄마이자 남편의 아내였지만,
실제 우리집의 주도권은 친정 엄마가 쥐고 있었다.
편하다고 할 수도, 고맙게 여겨야 할 수도 있었으나
가정 내에서의 나의 자리가 지워져 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나의 경계를 세우지 못하고 지워지면,
내 자리는 언제든 다른 누군가에게 넘어간다는 것을.
그 사실은 충격이었지만,
나는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내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나의 가정을 지켜내기 위한
긴 노력과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길고 고단한 과정 속에서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옆에 든든히 날 지키고 있던 남편 덕분이었다.
나의 엄마와의 갈등 앞에서,
그는 분명 내 편이 되어주었다.
내가 친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자신의 아내, 그리고 우리 아이의 엄마 자리를
다시 되찾을 수 있도록 나를 지지했다.
그의 지지가 있었기에
나는 끝까지 버틸 수 있었다.
외부의 갈등 요소가 있을 때,
더 강하게 뭉치는 것이 가족이라고,
나는 ‘남편이 우리의 성장을 바란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더 깊이 매달렸다.
‘그래, 결국 내 존재를 지켜주는 건 남편뿐이야.’
그 믿음이 내 안에서 점점 더 확고해졌다.
외부의 갈등이 커질수록
우리 안의 갈등은 잠시 가려졌다.
나는 그것이 우리의 관계가 돈독해진 증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 뒤에서,
내 존재는 또다시 남편 뒤에 숨어 가려졌을 뿐
여전히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을 분화하지 못한 사람은, 가족 안에서 쉽게 흡수되거나 지워진다.
A person who is not differentiated is easily absorbed or erased within the family.
— Murray Bowen, Family Therapy in Clinical Practice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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