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건 '그 사람'이었을까,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 였을까
보고 싶었으나 오래도록 미뤄둔 영화 <그해 여름>을 드디어 끝까지 봤어요.
젊은 이병헌과 수애는 정말 아름답네요. 오랜만에 호흡이 느린 영화 보니 좋아요.
역시나 떠오른 '첫사랑'에 대해 수다 떨까요.
최근 새로운 동네에 이사와서 모든 게 낯설 때, 처음 사귄 친구가 '이웃집 마당냥이' 였어요. 죽어가던 아기 고양이를 이웃집 산책견이 발견해 구조했는데, 그 이후로 그 집을 떠나지 않아 강아지와 함께 마당냥이로 커 온 고양이었어요. 이 고양이와 친해지고 밥을 주니, 저희 집에 와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지더군요. 아이들과도 친구가 되구요.
그리고는 언제부터인지 제게 '보은' 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꾸 쥐나 참새를 잡아다 주는 거에요. 처음에는 기겁했지만, 나중에는 그 고양이의 순수한 사랑방식에 헛웃음이 픽 났습니다. 저의 첫사랑도 아마 이랬겠지요? 이렇게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을 보며 내 방식대로 호의를 표시하느라 이리 서툴렀겠죠. 그저 사체들을 물어올때마다 명복을 빌며 잘 묻어줬습니다.
그런데 원래 저는 고양이는 무섭게 생기고 살갑지도 않아서 싫어했었거든요, 이 '첫 고양이' 덕분에 고양이라는 전체 종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애정이 생겼습니다. 저의 첫 고양이는 무지개 다리를 건넜고, 지금은 어미 잃은 유기묘 남매 두 마리를 입양해서 키우고 있어요. 마당에도 길냥이 두 마리가 와서 지냅니다. 첫 고양이라는 특정 대상에서 '고양이들' 이라는 넓은 범위로 사랑의 대상이 확대된 거죠.
심리학 중 정신분석쪽은 '사랑' 을 우리의 통념과는 조금 다르게 해석합니다.
라캉이라는 사람은 사랑을 내가 가진 근본적 공허·결핍을 ‘상대가 채워줄 것’이라는 환상을 기반으로 한다고 했죠. 즉, 내가 갖고 싶은, 그러나 내게 없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종류의 삶을 내 곁에 두고 싶은 욕망으로 시작한다고 설명해요. 그래서 정 반대의 기질의 사람에게 잘 끌리기도 하지요.
또한,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첫 이성이었던 부모와 비슷한 사람들을 사랑의 상대로 선택하기도 합니다. 무의식은 어린 시절의 어떤 결핍을 보상받고 싶어하기 때문이죠. 비슷한 삶의 무대를 재현해서 결핍을 해결하는 기회를 다시 갖고자 함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사랑의 첫 시작은 그럴 수 있어도 그 단계에 머무르지만은 않습니다. 성숙한 사랑은, 상대가 나의 결핍을 채우는 대상이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도 계속 관계 맺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고 해요. 어린 시절의 상처, 욕구나 판타지를 상대에게 전가하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그 너머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성장시키는 관계에 진입하는 것을 성숙한 사랑으로 봅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사랑하려는 의지'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열정의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 진정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별'은 어떻게 볼까요?
이별은 상대에게 부착되어 있던 '나 자신' 과의 이별로 봅니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그 시절의 나'가 사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사랑했던 만큼 그 사람과 이별하는 것은 자기 살을 떼어내는 고통처럼 아픕니다.
상담심리나 정신분석은 한 개인과 이런 사랑을 하는 과정이죠.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랑에서 또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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