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화된 아이
거의 모든 단어가 그렇듯, '철이 든다는 것' 의 의미도 각자에게 다른 의미와 뜻을 가진다. 누군가가 철이 좀 덜 들었다는 것은, 아직 이해해야 할 타인의 삶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이해해야 할 삶이 누구의 생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꼭 모든 걸 극복해서 진심으로 좋아해야한다거나 반드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 . 동의하지는 않을 수 있더라도 당신의 입장이라면 참 그럴만도 하겠다. 라고 공감하는 것. 그렇게 '나만의 세계' 에서 빠져나와 남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나가는 과정을 나는 '철든다' 라고 정의한다.
누군가의 삶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철든다' 라고 나는 정의한다.
아마, 나의 경우엔 내 엄마의 삶인 것 같다. 그녀의 삶엔 '엄마' 가 없었다. 힘들때 달려가 지친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품이 없는 7남매중 장녀였다. 공부를 잘했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뒷바라지를 받긴 커녕 별볼일 없는 남자형제들을 오히려 뒷바라지해야 했고, 집안이 그리 부자도 아닌데다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셔서 그야말로 정신적인 '소녀가장'이었다. 삶이 힘들고 피곤했으며 억척스럽고 호되게 자신을 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딸인 내게도 따뜻한 엄마가 되어주는데 실패했다. 물론 내 기준에서. 그녀는 그녀의 기준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왜냐면 나는 '따뜻하고 편안한 품'을 바랬기 때문이다. 그 따뜻함은 나는 오빠라는 존재로부터 다행히 느끼고 겪었고, 엄마 또한 그랬던 것 같다.
자식이 부모의 '엄마' 가 되는 경우는 실제로 정말 많다. 자식이 부모를 자신의 아이처럼 걱정하고, 안쓰러워하고, 보살피려 애쓰며 하나라도 더 해주지 못함에 죄책감을 느끼고 전전긍긍한다. 그 아이를 심리학에서는 '부모화된 아이' 라고 부른다.
부모화된 아이
그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돌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부모를 보살핀다.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들의 버팀목이 되려 애쓴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기댈 '엄마' 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애써 잊는다. 그렇게 나를 잊고 남을 보살피는데 매진하다가 소진된다. 그리고 자기가 왜 그렇게 힘들고 피곤한지조차 잘 모른다. 그저 슬플 뿐이다. 이를 교류분석에서는 '자기희생 심리도식' 이라 부른다.
자기희생 심리도식
비단, 나의 어머니 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과거 여인들은 이 심리도식을 갖는 것이 '착하다' '여성답다' '철들었다' 라는 긍정적인 문화적 압박을 받으며 자라났고, 특히 장녀인 경우에는 당연히 스스로의 '엄마' 가 되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의 막내딸이었던 나는, 그녀가 자신의 '엄마' 가 되어달라고 나를 못살게 굴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힘들고 지쳤으니 위로와 따뜻한 품을 내게서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런 것을 표현조차 해본 적이 없고 받아들여지지 않아 참 투박하게 아이처럼 투정을 부려왔음을.
사람은 정말 힘들 때 세 살로 퇴행한다고 한다. 그렇게 가끔 나는 그녀의 '세 살' 때의 모습을 마주해왔다. 누군가의 엄마가 된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귀여운 내 아이가 아닌 내 부모일 경우엔 더더욱. 내가 어리고 철이 없는 '내 세계' 에 빠져 있을 때는 더더군다나 이해조차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좋지는 않지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세 살의 그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힘들어서 급격히 세 살로 퇴행하여 '나' 를 찾는다.
내가 다시 그녀의 '엄마' 가 되어야 하는 시간이다.
보살피고 보듬어서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베이스캠프.
문득, 기어코 그 삶을 이해하려고 내가 아이 셋을 낳아 '엄마' 를 하게 되었나.. 이것도 내 삶의 목적 중 하나일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세 살이 전처럼 짜증나거나 부담스럽지만은 않다. 평생 그녀에게 따뜻한 밥을 얻어먹었으니, 이젠 내가 따뜻한 밥을 대접할 차례가 되었나보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외투를 선물로 입혀 드리고, 바람쐬고 즐거운 시간을 좀 같이 보내주어야겠다. 그냥 내 엄마니까라기보담은... 한평생 '엄마' 없는 피곤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에 잠시나마 내가 '엄마' 가 되어 드리고 싶어서이다.
그녀와 나는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자신의 삶에 작은 행복을 느끼길 원하는 다 같은 여자잖아요.
배우 김혜자의 말이 떠올랐다.
몇년 전보다는 내게 철이라는 게 조금 찾아왔나보다.
<그림 출처: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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