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대와 실망
시어머니는 따뜻했다. 주거니 받거니 대화도 잘 통하고 친정엄마에 비하면 잔소리도 많이 없는 편이라 처음에 소녀는 참 좋아했다. 차라리 이 분이 우리 엄마였더라면 더 좋았겠다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편한 것들이 생겼고, 역시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기
시작했다. 그 시작점이 어디였을까.
사실 며느리가 뭐가 어디가 이쁘겠노, 생판 남인데, 내 자식한테 손주들한테 내 대신 잘하라고 꾹 참고 잘해주는 거지 , 안그나?
한참 친구들에 대한 수다떨다 무심결에 내뱉으신 어머니의 이 말에 소녀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다. 하지만 뭔가 서운했다. 그 이후, 많은 사건들과 말들을 통해 소녀는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에게 그 소녀는, 그냥 당신의 역할을 대신해서 아들과 손주들을 보아주는 '대용품' 같은 존재라는 것을.
그걸 깨달았을 때 그리 슬펐다. 전의 가족에서도 '오빠의 대용품' 으로 여겨져 그리 슬프고 힘들었는데, 새로운 가족에서 그녀에게도 나는 그냥 그 '역할' 이구나. 나라는 사람에게 관심은 없구나..
주말 아들이 자고 있는 방문이 열리면 가서 살포시 닫아주셨지만, 평일 아침 아직 자고 있는 소녀의 방문이 열리면 일부러 듣고 빨리 깨라는 듯 일어나라는 듯 달그락 거리셨다. 그리고는 겨우 일어나 나오는 소녀에게 말씀하셨다.
뭐하노, 빨리 밥차리라 애들 배고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돌아서게 된 건, 막내인 셋째를 낳고 나서였다. 그 전까지는 도와주시러 올라오셨을 때, 소녀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노? 뭐 해주꼬? 그런데 출산을 모두 마친 후에는 "대충 김치랑 아무거나랑 먹자" 라셨다.
아, 날 위한 음식들이 아니었구나.
집에 들르셨던 어머니가 소녀가 책장을 돌려 좁은 방을 반으로 갈라 애써 만들어놓은 내 공간을 보며 말씀하셨다.
저 책장 책들 치우고 애들 옷 차곡차곡 정리해라
어머니, 저기에 저 공부하는 책들 들어있어요. 일부러 공부할 데 없어서 저렇게 제 공간 만들어놓은 거에요. 하지만 어머니는 다시 말씀하셨다.
그니까, 그 책들 치우고 애들 옷 계절별로 정리해놓으면 분류해서 꺼내 입기도 좋고
결국 시어머니에게 '그 소녀'는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가족에서도 믿을만한 내 편은 신랑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신랑도 그 소녀의 편에 기꺼이 서 서 행여나 스트레스를 받을까 노심초사 그녀를 보호했다. 그 소녀가 어머니를 싫어하는 내색을 본격적으로 비치기 전까지는.
하지만 소녀는 오랜 관찰 결과 시어머니에게 거슬리는 점이 몇 가지 생겨버렸다.
이중메시지 와 소녀를 향한 수동공격이었다. 의중을 알 수 없게 돌려말하는 것과, 직접 화낼수도 없게 에둘러 펀치를 날리는 방식이 너무 짜증이 났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살고 가끔 전화하는 정도라 이내 그걸로 인한 스트레스는 줄어들었다. 매번 그러시는 것도 아니니 몇 번만 간간히 참으면 되었다.
자신이 신랑과 아이들을 보살피는 어떤 '대용물' 처럼 느껴지는 게 너무 싫었다. 신랑 생일이면 오늘 뭐해먹었노? 라는 질문을 하는 식이다. 며느리 생일에는 당연히 하지 않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도 며느리라면 어느정도 감수해야 할 스트레스였다. 그냥 당신이 아들과 손주 먹이고 싶은 거 대신 하면 나도 좋지 라고 생각하고 반찬을 해주신다하면 받았다.
특히 거슬렸던 건, 아들 딸이 어머니가 원하는 걸 얘기하면 선뜻선뜻 해 주는 그 점이었다. 아들은 소녀의 눈치를 보느라 선뜻 못나섰지만, 어머니가 뭐가 갖고 싶다고 얘기하면, 딸이 엄마 그거 하나 해라, 내가 해주께. 라는 식이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걸 받아들고 딸이 사주더라, 이것도 주더라, 라며 행복해서 자랑하셨다. 그 소녀도 처음에는 어머니가 화장품에 대해서 그거 좋더라 라는 말을 한참 듣다가, 어머니 하나 사드릴까요? 라며 화장품 주문도 하고 용돈도 드리곤 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원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상대로 하여금 먼저 뭔가를 하도록 하는 그 방식이 너무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내가원하는걸니입으로얘기해' 화법이라 이름붙인 그 대화방식도.
그러나 무엇보다 제일 거슬리는 점은, 어머니가 아들인 자신에게 하는 것과 며느리에게 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며느리에게는 간간히 스트레스를 주며 수동공격도 서슴없이 한다는 점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듣지도 않으려 하는 '그 아들'이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 자식으로 하여금 받아내는 그 방식을, 자신의 엄마를 못된 사람에 거지 취급 한다며 엄마는 그런 의도가 절대 아니라며 그 소녀에게 되려 분노하는 그 아들이었다.
명절 때마다 고향에 가면 엄마와 한편이 되어 엄마 입장을 대변해 아버지와 말싸움을 벌이는 그 엄마편인 아들이었다. 그럴수록 소녀는 그 어머니의 이중메시지나 수동공격 등의 그런 점들이 더더더 눈에 자주 띠고 더 거슬렸고, 그 아들로 하여금 제대로 똑바로 그 점을 알고 인정하게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아들에게 이야기하려 기회를 엿보고 시도했다. 번번히 언짢아진 그의 모습과 반격에 매번 제대로 얘기도 못했지만. 그는 듣기 불편하고 거북해했다. 우리 엄마는 그런 나쁜 의도가 아닌데 니가 매번 꼬아서 자꾸 듣는다 했다. 나쁜사람 만들지 말라 했다. 그럴수록 소녀는 너무 약이 올라 신랑이 너무도 미워졌다.
그런데 그 소녀는 왜 그랬을까?
왜 어머니의 그런 방식이 그리도 거슬렸을까?
엄마편 들며 아버지에게 뭐라 하는 그 아들이 왜 그리 거슬렸을까?
왜 아들이 자신의 엄마의 그런 점들을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굳이 알려주려 노력했을까? 못된여자가 되는 위험을 무릎쓰고서도, 매번 잘 안통하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로부터 보호받고 싶었다. 그는 그 소녀의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 스트레스 주는 사람을 위해 참고 희생하라고 그 소녀에게 제발 말하지 않길 바랬다. 소녀의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그의 어머니로부터 스트레스 받는다는 걸 알아주고 그 스트레스 주는 사람과 마음으로 한켠 멀어지길 바랬다. '우리엄마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우리엄마는 나한테는 좋은 사람' 으로 바뀌길 바랬다. 소녀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녀 편을 들어주며 힘들겠다 기분나쁘겠다 이해해주고, 그녀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은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잘못했다 말해주기를 바랬다. 즉, 그에게 그가 지켜내야 할, 이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소중한 사람이길 원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누군가에 의해 침범당하도록 방치하지 않고 지켜주길 바랬다. 그게 누구의 엄마라도.
그가 소녀의 오빠같은 힘든 삶을 살지 않길 바랬다. 힘들게 돈 벌어 엄마 갖다 주고 엄마 살림살이에 보태고, 그러고도 걱정하고 매번 엄마 마음 상태와 힘들까 걱정하느라 자신의 삶을 맘껏 즐기지 못하다 어느날 죽은 소녀의 오빠처럼 되지 않고, '우리 엄마' 걱정은 좀 내려놓고 아니 잊어버리고, 그 엄마의 삶은 엄마의 남편인 아버님께 그만 그들의 것으로 돌려주고, 그 소녀와 자식들과 함께 즐겁게 '우리의 삶'을 살 수 있길 바랬다. 소녀의 남자가 남편도 있는 엄마 걱정을 끊임없이 하며 힘들게 살지 않고, 소녀와 우리만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며 즐겁게 살길 바랬다.
그리고 다시는 예전 엄마가 자신의 삶을 맘대로 침범했던 그 상황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소녀 자신의 삶이 그 누구라도 다른 사람에 의해 방해받는 것이 싫었다. 그 소녀는 그 남자와 결혼한 것이지, 그의 원가족 전체와 매 순간 함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소녀가 그랬듯이, 그도 원가족에서 독립하여 지금보다는 좀 더 먼 적당한 거리를 찾기를 바랬다.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그 소녀가 편할 수 있도록. 자주 침범당하지 않도록. 자주 스트레스 받거나 마음 상하지 않도록.
그 소녀에게 행복이란, 내 공간에서 내 맘대로 잠 푹 자고, 다른 사람의 이래라 저래라 간섭이나 공간의 침범도 없고, 사랑하는 든든한 내 편이 곁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소녀는, 그에게 보호받고 사랑받으며, 더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그 행복한 삶을 위해 그와 결혼했으니까.
그랬다. 그녀는 과거의 그 트라우마를 다시는 반복해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결혼한 단 한가지 이유는, 그 소녀를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해 줄 '단 한 명의 가족' 이 필요해서였으니까. 생전의 그녀의 오빠처럼 말이다. 그것이 허상인 줄 알면서도 버릴 수 없는 욕망은 그토록 끈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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