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프레임, 반복되는 갈등

by 실루엣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


트라우마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공포를 잘 설명한 속담이다. 어떤 것에 강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은, 조금만 비슷한 단서나 상황에도 민감하고 크게 반응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장된 반응의 기저 감정은 이기심이나 이해타산적인 사고라기 보다는 자신이 또 전과 같은 해를 입을 수 있다는 '공포' 인 경우가 많다.


부부관계에서 그들의 내면아이인 그 소녀와 그 소년이 강하게 충돌할 때 가장 강한 감정폭발이 일어난다. 그 소녀와 소년은 각자 등 뒤에 짊어지고 있는 그들의 전체 삶의 상처들을 모두 끌어들여 전투에 최선을 다해 임한다. 각자 과거의 너무나 힘들었던 트라우마의 상황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기에. 트라우마와 비슷한 상황을 연상시키는 자극에 대한 단서가 선명할 수록, 트라우마에 대한 공포가 강렬할 수록, 전투는 보다 절박하고 치열해진다.


언제나처럼 전투를 일으키는 사건의 발단은 단순하다. 시어머니 칠순. 코로나로 내려갈 수 없고 잔치를 할 수도 없는 상황. 게다가 소녀의 친정은 팔순까지도 그냥 단촐히 가족끼리 케잌 불고 맛있는 외식을 하는 문화였지만 시댁은 그런 문화는 아니라 조금 신경은 쓰였지만 어머니도 이 상황에 모이는 걸 원치 않는 눈치였다.


얼마 전부터 시어머니는 소녀에게 계속 말씀하셨다.


너네 김치 냉장고가 없어가, 냉장고 비좁쟈? 우짜노 넣을데가 없어서, 냉장고 하나 사라


괜찮아요 어머니, 저희 작은 김치냉장고 있잖아요. 비좁지만 어째요 김치냉장고 사면 둘 데도 없어요. 괜찮아요. 라고 대답하는 내 대답에도 '너네 김치냉장고 없어 부족하쟈? 큰거 하나 사라' 가 '음식 보내도 되겠나 니네 냉장고가 그리 생겨가' 한 네 다섯번쯤 반복되었을까. 알아차렸다. 어머니가 김치냉장고가 갖고 싶으시다는 걸.


어머니가 김치 냉장고 갖고 싶으신지 계속 나보고 자꾸 사라고 얘기하시던데. 그거 어머니가 갖고 싶다는 뜻인데. 라고 신랑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신랑이 얼굴이 살짝 이그러지며 말했다.


에이, 엄마가 우리 사주고 싶어서 그러시는거지,
엄마는 김치냉장고가 두 개나 있잖아.


결국 칠순 때 코로나 여파로 우리는 모이지 않고 용돈을 드리는 걸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차라리 내려가는 차비를 얹어 용돈으로 더 드리는 게 낫겠어. 그리고 친정에서도 잔치 못하는 상황이라며 적지만 현금을 나를 통해 건네주라며 보내오셨다. 나는 예쁜 꽃케잌을 배달시켰고. 그 날, 어머니는 너무 행복해하셨다. 오랜만에 주머니가 두둑해졌다며 싱글벙글 하셨고, 우리도 행복했다.


그런데 그날 밤, 저녁 9시가 형님이 그 소녀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님이 김치냉장고를 사러 여기저기 다녔는가 보다고, 근데 이상한 프로모션을 하는 걸 듣고 와서 딸인 형님께 지금 서너번째 전화를 해서 '이거 해야겠쟤? 사도 되나?' 라고 자꾸 묻는다는 것이었다. 신랑 삼성 다니는 친구한테 저번처럼 냉장고 싸게 살 수 있는지 알아봐서 엄마한테 알려달라는 거였다. 그 소녀가 듣기엔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엄마가 그렇게 얘기하는 건 사달라는 소리라고 직접 소녀에게 항상 말해왔던 형님이었고, 그녀는 절대 밤늦게 그리 급하게 전화한 적이 없었다. 그것도 자기 동생한테 하는 부탁을 동생이 아닌 그 소녀에게 에둘러 하는 것도 처음.


일단 시어머니는 김치냉장고가 두 개나 있다. 두 분이 사시는데 왜 또 필요한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래 당신 돈으로 갖고 싶은 거 사시는 건 내가 뭐라할 수 없지. 근데 문제는 칠순에 김치냉장고가 갖고 싶다 하면 , 됐다 그거 내가 사주께, 라고 말할 그 착한 아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을 재우고 돌아와보니, 그는 이미 자기 엄마와 형님과 통화를 끝내고 엄마가 원하는 모델 파악 중이었다. 삼성 친구에게 최저가를 알아보는대신, 그는 인터넷 최저가를 찾았다.밖에 있는 김치냉장고가 고장났대. 이왕이면 삼성 아니고 딤채를 원한단다.


이건 이번에 우리가 사드리자 칠순인데.



자금 관리는 신랑이 하니 이미 칠순 용돈은 따로 송금완료되었을 터였다. 하나가 고장났으면 일단 고쳐 쓰면 될일이었다. 음식이 넘치면 줄이거나 나눠주면 될일이었다. 결국 원하시는 스댕 스탠딩 김치냉장고를 추가로 사드리는 거였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아들은 140만원을 결제했다. 아니, 결제는 해본 적이 없어 잘 못하는 신랑 대신 그 소녀가 했다. 굳이 그의 카드로.


그리고 그 소녀는 그 남자가 자기의 물건은 5천원짜리도 쉽게 결제를 못해서 항상 그 소녀가 대신해주며, 옷도 유니끌로 9900 원짜리 티셔츠만 입으며, 행여나 십만원이 넘는 자기 옷을 사오면 이건 필요없다 반품시키라 해서 다시 반품했던 게 생각났다. 그리고 최근 주식으로 소소하게 얼마 벌었다 라며 행복하나 정작 자기 물건은 쉽게 그 무엇도 지르지 못하는 그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런 그가 항상 안타까워서 함부로 그의 돈을 쓰지 못하게 된 그 소녀는 행여 비싼 요가복이나 요가매트나 외투나 자신의 사치품은 자신의 비자금인 퇴직금에서 냐금냐금 퍼서 써왔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자전거를 좋아해서 큰 맘먹고 산 유일한 고가의 제품인 자전거를 시간날때마다 닦고 조이고 하며 정성스레 보살피는 그는, 과거 생활비를 대부분 선뜻 엄마에게 가져다주고 자신은 어렵게 모아 겨우 모은 엘피디 애장품을 닦고 닦는 그 옛날 오빠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그는, 그 불쌍했던 오빠를 떠오르게 했다. 소녀는 너무 화가 났다.


이봐, 매번 이런 식이라니까. 당하더라도 알고는 당하라고.


그 소녀는 신랑에게 쏘아붙였다. 신랑은 아, 또 그렇게 비꽈서 생각하느냐면서 그러지 말라했다. 엄마가 돈 준다 하셨다고. 하지만 돈 문제가 아니었다. 칠순에 엄마가 냉장고 사달라면 그 아들은 됐다, 내가 이건 사주께. 라고 말할 것을 그 소녀는 잘 알고 있다. 그의 어머니도 누구보다 분명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아마도 돈 넣어주께 했는데도 거절하고 굳이 엄마가 갖고 싶다고 사주는 착한 아들이 될 터였다. 아니, 돈도 문제였다. 두 분이 사시는데 김치냉장고가 두 대나 있는 어머니를 위해 추가분을 사드릴 정도로 돈이 넘쳐나는 상황이 아니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난 아이들 방에서 잘께.


라며 소녀는 신랑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보기도 싫었다. 밤새 과거의 오빠의 엘피판 닦던 그 애처로운 모습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불쌍하게 엄마 생각만 하던, 그러느라 자신은 돈이 없어 결혼은 못할 거 같다고 힘없이 중얼대던 그 모습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소녀의 과거가, 그녀의 엄마와 아빠와 오빠가 한꺼번에 그 밤 덮쳐왔다.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트라우마였는데 다시금 자신이 그 상황안에 있음을 깨닫고 절망스러웠다. 오랜만에 그 과거의 상황에 다시 들어간 듯 생생하게 과거를 느끼며 버티던 소녀는 그 옛날 어느 밤에 그랬던 것처럼 깊은 잠을 위해 술을 많이 먹고 또 울다 잠들었다.


그 다음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칠순에 아들이 어머니 냉장고 하나 사드리는 게 그리 잘못된 일이야?
그렇게 못되게 굴지마.

It's not that simple, boy.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야? 그 소녀는 문제를 그렇게 단순화시켜 못된 며느리로 몰아가는 프레임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불이 켜졌다.


아니 난 김치냉장고 사드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거부만 하지 말고, 말만 듣지 말고 이제까지 벌어진 결과들만 놓고 쭉 보라했다. 제발 좀 독립 좀 하라고, 엄마가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실상은 실상이니. 제발 똑바로 좀 보라고. 어떻게 시어머니를 그렇게 매도할 수 있냐고 반격하는 그에게 말했다.


자기껀 오천원짜리 결제도 못해서 벌벌떠는 당신이 너무 불쌍하다고!



난 누구에게 얘기했던 걸까. 신랑이었을까, 아님 그녀의 오빠였을까. 사실 누구에게 잔뜩 화가 났던 걸까. 누구와 싸우고 있었던 걸까. 난 그 말을 사실은 누구에게 하고 싶었던 걸까.


불쌍하다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자기 입장만 얘기해? 라는 신랑에게 다시 온 힘을 다해 쏘아붙였다.


내가 내 입장 얘기하지 그럼 누가 그러니? 당신은 항상 시어머니 대변자고, 내가 내 입장 얘기하는데 그게 잘못이야?


그 때 난 누구에게 쏘아붙인 걸까. 신랑에게였을까, 아니면 그 옛날 니가 못되게 굴지 말고 니가 무조건 참으라고 말하던 그 소녀의 아빠에게였을까. 난 그 때 누구와 싸우고 있던 걸까, 신랑일까 과거의 아빠일까. 아님 둘 다일까.


만약에 부모님 편찮으셔서 좀 모시자고 하면 난리날거같어. 그렇게 못되게 구는 거 아냐. 라는 신랑에 말에 공포에 휩싸여 다시 쏘아붙였다.

어 싫어. 내가 분명 얘기했을텐데.. 싫지만 하겠다와 싫으니 안하겠다는 구별해줬음 좋겠어. 어려워서 어쩔 수 없는 거면 당연히 의무로 해야하지만, 싫지만 기꺼이 한다 였고,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같이 사는 건 싫다 했어. 당신 옆에서 살고 싶고 간섭하고 싶고 나를 cctv처럼 감시할텐데 누가 버텨!! 난 내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야 자꾸 못된 여자 만들지마!


난 사실 누구의 침범에 그렇게 공포에 질렸던 걸까. 진짜 그녀의 삶을 속박하고 침범하고 간섭하고 잠못자게 하고 cctv처럼 감시하고 불편하게 했던 사람은 그 시어머니였을까, 아님 그 옛날 그 소녀의 어머니였을까. 그녀는 그 순간 누구의 침범에 반응하고 있었던 걸까.


넌 우리 가족을 알로 보는 거야. 그렇게 무시하는 거야. 라는 신랑의 말에 소녀는 무너져서 외쳤다.


남의 편이라 남편이라더니, 그래도 넌 좀 다른 줄 알았지. 당신같은 사람을 그래도 유일한 내편이라 생각했던 내가 좀 불쌍하다


그렇게 최종 수류탄을 던지고 주고 받고 기관총 발사하는 치열한 전투가 끝난 후, 그 소녀는 남은 총알을 가지고 내면에서 여기저기 소동을 피우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별별 생각이 다 들며 끓는 화로 몸이 불덩이같이 느껴졌다. 큰 배신감에 몸이 파르르 떨리고 어떻게 복수해주지 라며 기관총에 총알을 장전했다. 안에서 정말 요란한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렇게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며 총을 이리저리 쏘아대는 그 소녀의 깊은 마음 심연엔 그 자신의 모습에 대한 초라함에 대한 실망감과 상실로 인한 깊은 슬픔이 있었다.


하나뿐인 자기편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어린 마틸다의 격렬한 슬픔과 절망 말이다.
오빠가 죽었을 때,
혼자 남겨졌던 그 소녀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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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 is dead.


다시 한 번 그렇게 그 소녀는 그 옛날 강렬한 트라우마의 한복판에 놓여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것이 보통 트라우마가 우리에게 일으키는 일이다. 아니,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만들도록 하는 일이다. 같은 프레임의 반복말이다. 그리고, 마음이 그것을 계속 되풀이하여 만들어내는 이유는, 거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 위한 resetting이라고 믿고 싶다. 오락에서 그 판을 깨려면 수 없이 죽고 죽어도,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그 판에 다시 부활하여 처음부터 다시 게임을 시작해야 하듯이.


#트라우마

#부부싸움

#내면아이들이일으키는전쟁

#내면아이작업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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