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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Apr 21. 2021

구운 조기가 있던 밥상을 엎어던졌다

조기구이

다섯 살 터울인 동생과 함께 우리집 얘기를 할 때면, 늘상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도 우리, 이정도면, 나름대로 바르게 컸다는 얘기다. 삐뚤게 엇나가지 않고, 썩 나쁘지 않게 자랐다는 얘기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학교 다닐 때, 소위 땡땡이 한 번 쳐본 적이 없고, 담배는커녕 술도 안 마셔봤다. 가출은 물론이거니와 집에 늦게 들어간 적이 있나 싶을 정도다. 수업도 열심히 들은 덕에 선생님들한테도 애정 받는 아이였던 것 같다.


마냥 순종적이지만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반골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렇다고 하면, 왠지 아니라고 하고 싶은 마음. 주류에는 왠지 반대하고 싶은 욕망. 마이너 감성. 그러니까 마냥 얌전하지만은 않았다.


동생과 함께 입을 모아 말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엇나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부모님 덕, 특히 어머니 덕이라는 거다. 우리는 안다. 우리가 큰 말썽 없이 무사히 자라날 수 있었던 건, 십분 백분 어머니 덕이다. 우리의 천성 덕이 아니라, 어머니의 키움 덕.


그러고보니 동생도 어느덧 서른이다.



우리 어머니는 엄하지 않으셨다. 무언가를 강압한 적이 없으셨다. 그 흔한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우리집에선 없었다. 심지어 학교에 가는 것조차 그랬다. 학교에 가기 싫다하는 날이면, 정말 학교를 보내지 않으셨다. 담임선생님께 전화만 한 통 해주실 뿐이었다. 그렇게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좋다 하셨다. 시대를 앞서가는 양육이었다. 우리 오누이에게는 자유가 듬뿍 주어졌다.


어머니 덕에 우리가 엇나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우리를 엄하게 키우셨기 때문이 아니다. 어머니가 엄하셨더라면, 어머니 눈 밖에서 나쁜 짓을 하려고 궁리를 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의 시야에 관계 없이 우리가 못된 짓을 하지 않았던 건, 어머니가 당신의 잔상을 우리 마음 속에 남겨놓으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희생적이셨다. 어린 자식이 체감할 만큼, 당신의 아들딸에게도 그러하셨다.


얘기 하나.


초등학교 때 일이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 나이의 애들이 으레 그러하듯, 방학이 거의 끝나감에도 불구하고 방학숙제를 마무리하지 못 한 상태였다. 마무리는커녕 해야할 양의 절반도 채 못했었던 것 같다. 이제 곧 방학은 끝나는데, 해야할 숙제는 많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하지 않게 되었다. 할 일이 많고 시간이 없다면, 얼른 해야 마땅하겠지만, 할 일이 너무 많고 시간이 너무 없으니까 의욕이 생기지 않는 거다. 도무지 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거다. 그래서 안 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때였는데, 차일피일 미뤘다.


어머니께는 이 상황을 말씀드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엄하지 않으셨으되, 단호하셨다.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해서는 무한한 자유를 주셨지만, 해야할 일은 분명히 해야하노라고 또렷이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서 방학이 다 지나도록 방학숙제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을 얘기할 수 없었다.


방학의 마지막 날. 개학식 전 날. 컴퓨터 앞에 앉아 신나게 게임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물어보셨다. 방학 숙제는 다 했냐고. 올 게 왔다. 이제는 도저히 더 숨길 수 없는 때.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사실, 나 방학숙제 안 했노라고. 웃으면서. 싱글거리며. 일부러. 가볍게. 칠렐레 팔렐레.


순간, 어머니의 표정이 변했다.


"엄마는 너희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무거운 목소리였다. 장난스럽게 말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커도 너무 큰 착각이었다. 오산이고, 오판이었다.


"엄마는 너희에게 숙제 안 해도 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엄마가 언제 너희 노는 거 가지고 뭐라고 했니. 할 거 하고 놀라고 했는데."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건 다 엄마가 잘못 가르친 탓이다."


그리고는 이어진 어머니의 행동.

충격적이었다.


아직 게임 화면이 점멸하고 있는 모니터. 그 앞 의자에 앉아 있는 철 없는 아들. 그 옆 방바닥에, 어머니는 무릎을 꿇으셨다. 아들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으셨다.


"숙제 다 할 때까지, 엄마는 여기 있을게. 엄마가 잘못 했으니까."


당황했다. 난처했고, 황망했다. 어찌할 줄 모르다가, 일단 어머니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어머니는 정말로 무릎을 꿇어 앉으신 채, 꼼짝하지 않으셨다.


아들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얼른 숙제를 끝내는 게 최선이었다.


눈물이 났다. 콸콸. 무릎 꿇은 어머니를 옆에 앉히고, 아들은 못 다 끝낸 방학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울며 불며. 제가 죄송하다고, 잘못했다고, 숙제는 꼭 할 테니까 그만 일어나시라고. 하지만 어머니는 일어나지 않으셨다.


몇 시간이나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방학 숙제가 다 되고 나서야, 비로소 어머니는 일어나셨다. 오랜 시간 무릎을 꿇은 채 계셔서인지, 다리가 저린듯 절뚝거리며 일어나셨다.


어머니에게 아들은 울며 사과했다. 연신. 죄송하다고. 잘못했다고.


자식이 숙제를 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스스로를 혼내셨다.



얘기 둘.


역시 초등학교 때 일이다. 어느 주말, 점심 쯤이었다.


할머니는 생선장수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우리와 함께 살았다. 한 집에 사는 식구였고, 가족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 밥상에 생선이 올라오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 날은 조기구이였다.


누렇게 변색된 장판 위에 얕게 깔린 요. 그 위에 앉은뱅이 밥상이 들어온다. 제멋대로 생긴 접시, 특별나지 않은 찬, 압력밥솥으로 앉혀 매번 조금씩 맛이 다른 밥. 그 날의 밥은 유독 질었다.


조기는 장판보다 더 노르스름했고, 진 밥보다 더 윤기가 났다. 꽃을 좋아하시는 우리 어머니가, 본인의 손에 비린내를 묻혀가며 축축한 식재료를 손질하고, 베란다에 따로 나있는 주방에서, 외풍을 맞아가며 구워내신 결과물이다. 자식새끼 먹이겠다고, 고생하신 결과물이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심통이 났었을까. 그 날따라 유독 질었던 밥과 그저 그런 반찬들로 인해 입맛이 물렸을까. 창 너머로 보이는 높다란 친구네 아파트의 깔끔한 유럽식 식탁과 우리집 앉은뱅이 나무 밥상이 비교가 되었을까. 하여튼 분명한 건, 아드님 심기가 과히 편치는 않으셨었다는 거다.


모든 미디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의지 박약 아동에게 일부 미디어가 나쁜 영향을 미치는 건 맞는 것 같다. 가령 드라마의 모습들이 그랬다. 연속극이라고 불리던 그 시절 지상파 드라마들은, 아직 성인지 감수성이 풍부하지 않았던 터라 가부장적인 가정의 모습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브라운관으로 송출하곤 했다. 오늘날 우리의 도덕적 관념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장면도 많았다. 예를 들어, 연속극 속 어르신이 밥상머리에서 화가 났다치면, 때때로 어르신은 밥상을 뒤집어 엎곤 했다. 밥상을 차려내는 건 여자였고, 그걸 엎으며 소리를 지르는 건 남자 어른이었다. 그럴 때면, 야트막한 밥상 위에 가지런히 차려진 한 끼 식사는, 여지 없이 바닥을 뒹굴곤 했다. 하늘을 향해 배를 뒤집어 까고 있는 밥상의 모습이 가련했다.


다시 말하지만,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심기가 편치 않은 아드님이 어머니와 대화를 했고, 대화를 하면서 아드님의 심기는 더 불편해져 갔으며, 아드님은 드라마 속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곤 드라마 속 장면을 따라했다.


버럭.

꼬맹이는 성질을 내며 밥상을 엎었다.


운 좋게 요 위에 떨어진 접시들은 제 모습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몇 개 그릇은 바닥에 부딪히고 이런 저런 가전가구들에 부딪히면서 날카롭게 깨져버리고 말았다.


때깔 좋던 조기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조기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어린 아이 팔뚝만하던 몸통은 반절이 뚝 부러져 내장을 흘렸다. 조명을 받아 윤기내던 조기살은 부수어졌다. 흩뿌려졌다.


밥상을 뒤엎은 모습은 드라마에서 종종 봐왔었지만, 드라마에서 보여주지 않던 게 있었다. 뒤엎어진 밥상을 치우는 일이었다. 테레비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밥상을 치우기 전에 화면이 전환되었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는 밥상을 치워야 했다.


엎어진 밥상을 치우는 건, 궂었다. 호기롭게 밥상을 엎어버린 것과는 대조적인 일이었다. 단번의 버럭으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인내를 갖고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었다.


당신의 어린 아들이 어미 앞에서 밥상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무례한 짓을 했음에도, 어머니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셨다. 잠시 눈을 감고, 입술을 무신 채 마음을 가라앉히시는 듯 했다. 그리고는 애써 차분한 어조를 지키며 말씀하셨다.


"이리 나와있어. 엄마가 치울게. 손 다쳐."


깨진 접시와 유리 조각들과 이제는 못 먹게 된 조기 덩어리들. 어머니께서는 인내를 갖고 차근히 방을 정리하셨다. TV 진열대 바퀴 밑, 서랍장 틈 사이, 문지방 앞. 파편들은 안방 곳곳에, 구석마다 박혀있었다.


"...죄송해요"


주섬주섬. 아들의 철 없는 흔적을 주워내시는 어머니께, 깨어진 도자기 보다 작은 목소리로 사죄드렸다.



동생과 나는 말썽을 피울 수가 없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불량스러움을 동경하기도 했지만, 정말 그런 길로 빠져들었다간 어머니께서 가슴 아파하실 게 뻔했다. 슬퍼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니, 도저히 범생이의 길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거대한 우울함에 일상이 짓눌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이대로 삶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이대로 삶을 마치면 내 삶은 더 나빠지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삶의 시작은 선택하지 못했으나, 삶의 끝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차마 생을 마감하지 못 했다. 이승에 남아 자식의 죽음에 아파하실 어머니의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나 좋자고 어머니께 평생의 한을 박아넣을 순 없었다. 자의반 타의반 생을 이었고, 덕분에 지금 여기. 글을 쓰고 있다.


수십 년 전, 어머니로 인해 생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키움 덕에 자랐고, 생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었다. 나의 지금은, 온전히 어머니 덕이다.



훗날, 내 자식이 그러면 어떨까. 어머니처럼 할 수 있을까. 울컥 올라오는 화를 꾹 참으면서, 자식놈 손 베이는 걸 먼저 걱정할 수 있을까.


글쎄. 자신이 없다.


오늘도 생각한다.

새삼.

우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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