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간의 산티아고 순례기 04 - 순례 1일차
순례자의 城 론세스바예스
이른 새벽, 아직 먼동이 터오르기 전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이 정도 비는 금방 그칠 것으로 생각했다. 예전 국토대정정과 성화봉송 경험도 있어 수시로 내리는 비에는 익숙했기 때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생장을 빠져나갈 때쯤, 어제 순례자 사무실에서 나눠 준 지도를 들고 고민에 빠졌다. 절대 나폴레옹 루트 쪽으로 가면 안된다는 말에 그쪽으로는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지도를 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짧은 길을 갔다가 되돌아오고 다시 마을 사진 한 장 찍고 그러는 사이, 어느새 푸르스름하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순례 첫날, 론세스바예스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숙소를 벗어나 한 20~30분 갔을 무렵, 알베르게에서 만난 미국 유학생 친구가 반갑게 인사하면서 씩씩하게 지나쳐갔다. 점차 굵어져가는 빗발에 할 수 없이 우비를 꺼낼 무렵이었다. 혹시 해서 산 물과 바나나는 봉투에 넣어 들고 가다가 아예 허리띠쯤에 묶어버리고 등산 스틱을 힘차게 들고는 길을 나섰다. 비가 와서 안경에 김이 서리는 것도 있었지만, 생장의 푸르른 풀밭에서 나는 싱그러운 향기가 11월에도 꽤 기분 좋게 다가왔다.
길을 걷는 짬짬이 알베르게 친구들과 마주치기도 하고 비가 그쳐 우비를 벗기도 하면서 계속 걸어 나갔다. 예상보다 순조로운 발걸음에 ‘이 정도면 18일에도 잘 하면 완주하겠는데’ 하는 욕심이 떠올랐다. 산을 오르고 하면서 그다지 힘든 것도 없다 보니, 11시 반쯤 되어 마주친 한 레스토랑도 그냥 다음 마을에 가서 먹자, 하고 지나쳐 버렸다.
그때부터 수난이 시작됐다. 순례 준비 팁에서 얘기한 것처럼, 겨울 까미노는 레스토랑이나 알베르게가 문을 닫은 곳이 많다. 또한 지나쳐 가는 곳도 20~30호 남짓의 소규모 시골 마을도 꽤 많으니, 아차 하면 식사 때를 놓치거나 잠잘 곳이 없기는 태반이었다.
그 교훈을 첫날부터 깨달았다. 그때부터 마지막 숙소 론세스바예스까지 도착할 때까지 나는 한 끼도 먹지 못하고 계속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려, 비에 젖어 김 서린 안경은 흘러내리거나 산으로 올라갈수록 추워지는 날씨에 더욱 걸리적거리거나 그랬다.
한 한국인 형님을 만난 것은 천운이었다. 작년에도 왔었다는 50대 초반의 그는 내게 자신이 마트에서 사온 2리터짜리 큰 물을 내밀었다. 한참 레스토랑이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하면서 한 마을, 두 마을을 지나며 물도 떨어졌을 때였다. 심지어, 중간에 4일 전 사람이 실종된 곳이 있어 피하라는 산길로도 다녀서 몸의 체력은 급속도로 떨어져 갔다.
그 형님과 나는 도로는 제치고 그래도 지름길이겠거니 하면서 산길로 가기로 결정했고, 바로 거기가 사람이 실종된 곳 부근이었던 것이다.
한두 고개만 넘으면 되겠지, 하는 산길은 1시간이 넘게 이어졌고, 물론 전문 등산하는 분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아마추어 40대, 50대 아저씨들이 넘기에는 너무 가파르고 더구나 배고픈 상태에서 이를 넘는다는 것은 시련에 가까웠다. 더구나 높이 올라갈수록 손은 급속도로 시려 왔고, 어느 틈에 그 장갑도 그만 잃어버렸다. 첫날, 첫 순례 치고는 배도 곪고, 가지 말라는 길로도 가고, 장갑도 잃어버리고 참 다양한 경험을 했던 것이다.
완전히 기진맥진해 더 이상은 정말 못 가겠다, 싶을 때 산의 정상이 나오더니 이내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내리막길에 순례길의 표식인 조개 표식이 이어졌다. 작년에 와 봤다는 형님은 그 길을 보자마자 전우애도 없는지 먼저 간다고 하고는 잽싸게 비탈길을 내려가 사라졌다. 나도 그처럼 빨리 가고 싶었으나 이미 온 몸이 만신창이인 상태인지라 내리막길도 그리 쉽게 내려가진 못했다.
11월 까미노는 대략 6시 정도면 어둡다. 따라서, 산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그 전에 숙소를 찾아 두거나 만약 눈 앞에 새로 산이 보이면 그 산은 내일 가는게 낫다. 자칫 잘못하면 산 속에서 길을 잃거나 야생동물에게 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내리막길에 섰을 때가 오후 5시 정도였는데, 이미 산길을 여러 시간 헤맨 데다 비를 맞고 점심까지 굶어서 온 몸에 기운이 다 빠진 상태였다. 그래도 산속에서 잘 수는 없어 간신히 한 발 두 말 발을 옮겼다. 손은 이미 땡땡 어는가 싶더니 아무 감각도 없을 정도로 시려왔다.
계속 날은 추운데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질까봐 등산 스틱을 잡은 손에는 잔뜩 힘을 주었다. 아마 그때부터 물집 조짐은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빗길 등산은 후반부 오 세브레이오에서 겪었던 눈길 등반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그후로도 숱한 빗길 등반을 이어갔으니 말이다.
론세스바예스 숙소는 18일간의 순례길에서 가장 좋은 알베르게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산속에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싶을 정도로 굉장히 크고 2층 침대도 비교적 새거였으며 취사시설도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다. 물론, 내부에 마트가 있지는 않으나 간단한, 정말 간단한 식사거리는 팔고 있으니 참고바란다.
그렇게 수속을 하고 침대를 배정받고 씻은 후 한숨 돌리고 나서야 먼저 두고 간 그 형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정말 울고 싶어서 달아났다”라고 그 형님은 웃으며 얘기했다. ‘그렇겠지요’, 같이 빗속에서 떨었던 ‘전우’로서 그의 말은 십분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식당도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다. 깔끔한 레스토랑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순례자 메뉴도 있어 배불리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내일 아침 식사도 예약하고 같이 순례길에 오른 다른 나라 사람들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길게 얘기하거나 연락처를 묻거나 하진 않았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내 순례의 목적은 2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첫날 호되게 당하고 보니 이것이 주님께서 마련하신 시련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우리가 삶속에서 익숙하게 마주치듯이, 이것 또한 그분께서 내가 겪도록 허락하신 그것인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나는 좀 행복하면 안될까, 하는 마음, 좀 쉽게 왔다 쉽게 갈 수는 없을까, 하는 그런 탄식.
어려운 문제다. 때론 인간은 자신이 고통을 만들어 놓고 신의 탓을 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라며 좌절하거나 한다. 전쟁을 일으켜 놓고 ‘이 전쟁에서 우리가 이기게 해 주세요’, 하거나 범죄자 가득한 도시를 만들어 놓고 ‘이 악에서 저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내가 꿈꾸는, 내 꿈이 실현되길 간절히 바라고, 대부분 그 꿈의 끝에는 좋은 차와 집, 명예와 가족 등이 연관돼 있다.
꿈을 꾸는 게 잘못 된 건 아니다. 편안함을 바라는 것 또한 잘못 된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그분께서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을 허락하신 것 아닌가, 하고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때론 이런 생각이 든다. ‘신은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더 빨리 가려는, 더 많이 가려는 내 마음이 점심을 거르고 험한 빗길 속 산길로 나를 이끌었다고. 내가, 우리가 꿈꾸는 조그마한 욕심 하나가 바로 나를 사지로 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신은 내게 2리터짜리 물을 든 그 형님을 보내지 않으셨던가. 신은 고통을 만들기보다 고통을 해결해 주시는 쪽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다.
아픈 발을 꾹꾹 누르며 ‘앞으로 17일을 더 어떻게 가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아주 잠깐. 그렇게 1일차가 저물고, 눈을 떴을 때는 비가 말끔히 개인 2일차였다. 내일은 어떤 하루가 될까? 아마도 나는 하루 종일 걷고 있을 것이다. 다만, 식사는 꼭 거르지 않고 하리라. ‘욕심이 나를 버린다’ 라고 생각했다. 아마 다들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각자의 배낭에 조개 하나씩을 매달고 이 깊은 산속을 헤매다 깊은 단잠을 청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수많은 하늘의 별 가운데 아주 잠시 산속에서 길을 잃었던 조그마한 별이었다. 이 우주를 작은 조개 표시 하나에 의지하면서 방황하며 떠도는, 나는 작은 우주여행자였다.
나는 수많은 하늘의 별 가운데
아주 잠시 산속에서 길을 잃었던 조그마한 별이었다.
이 우주를 작은 조개 표시 하나에 의지하면서 방황하며 떠도는,
나는 작은 우주여행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