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되는 걸까?

-마음의 고통을 재단하는 행위에 대하여

by 푸르른도로시

티비에 자살한 사람에 관한 뉴스가 뜨면 주변 어른들이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배가 불러서 그런다. 너무 바쁘면 죽을 생각도 안 든다.” “죽을 용기로 살면 될 텐데, 쯧쯧.”

이런 말들을 들을 때면 화가 나는 동시에 의문이 피어오르곤 했다. ‘왜 누군가의 고통을 일면식도 없는 남들이 재단하는 거지? 마치 자기들에게 그럴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항우울제를 먹고 있다는 얘기를 하면 종종 듣는 소리가 있다. 빈도수는 종종이지만 내용은 항상 비슷하다.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네가 왜 힘들어?’ 라던가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자면 우울 장애는 기질적인 문제도 커서 사랑받고 자랐어도 운 나쁘게 당첨될 수 있고 아무리 사랑을 받고 자랐다한들 그 사랑의 방향이 어긋나 당사자에게 제대로 와 닿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또, 힘듦을 느끼는 정도는 개개인의 기질과 자라난 환경이 뒤섞여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힘들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무척 힘든 일일 수 있다. 게다가, 힘들어해도 되는 사람과 힘들어 해선 안될 사람을 판결하여 선고를 내리는 재판관이 있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힘듦을 토로할 권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몸을 뉘일 집, 입에 들어 갈 밥, 안전하게 일을 볼 공간이 확보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감히 자기가 힘들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그조차도 갖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니까. 불행의 정도를 저울질 하다보면 결국 모든 것을 무(無)로 귀결된다. 아무도 불평불만을 할 수 없는 세상이라니, 어쩌면 그곳이 천국일지도 모르겠다. 힘들다고 징징대는 저 주둥아리를 당장 봉하고 그 목을 쳐라! 댕강.


두 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사람들은 우울해 보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어둠의 기운을 줄줄 흘리고 다니는 사람을 누가 반기겠는가. 우울한 사람도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어둠의 기운을 숨겨야 한다. 그래야 일을 구하고 돈을 벌어 입 안에 따뜻한 밥을 넣지 않겠는가.


아마도 소아·청소년 우울증을 겪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으로서(전문가의 의견이 아닌 자체적 판단임을 밝혀둔다.), 사회성이 발달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는 우울의 분위기를 눈치 없이 마음껏 뿜고 다녔다. 마음이 힘들어 늘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살았고 인상은 늘 어두웠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틀림없이 밥 맛이었을 내 곁에 끝까지 머물러줬던 친구들에게 감사를 넘어 경의를 표하게 된다. 아무튼 그 지난한 세월을 겪으며 나는 우울·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표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생존을 위해 덜 재수없어 보이는 법을 터득하려 애썼다. 태생적으로 감정이 얼굴로 다 드러나는 사람인지라 아직도 꽤 어렵지만 상태가 좋을 때면 외성적인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하니 어느 정도는 성공적이라 할 수도 있겠다. 요새는 마스크 덕분에 가면 쓰기가 한결 쉬워져서 영원히 마스크를 벗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마저 들기도 한다.


사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인간은 살기 위해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 한다. 동물들이 천적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아파도 내색 않듯이. 우울증도 병인데 병증이 밖으로 드러나서 생존에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니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라는 답을 들으면 이걸 어떤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할지 망설여진다. 문맥에 따라 ‘넌 매우 정상적으로 보인다.’일 수도 있고 ‘우울증이라니, 오버하지 마.’일 수도 혹은 둘 다 일수도 있다. 첫 번째라고 해도 굳이 기뻐할 일은 아닌 것 같고 두 번째라 하면 적절히 반박해야 할 것 같은데 거기까지 나가려니 귀찮음이 눈앞을 가린다. 뭐, 알아서들 생각하슈.


한 가지 확실한 건,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아프다는 건 이미 중환자실에 실려 가야 할 수준이라는 거다. 이 세상에는 시한부 선고를 받을 때까지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한채 앞만보며 내달리는 사람들이 꽤 많다. 남들도 다 힘들고 아프니까, 힘들어도 참고 이겨내야 도태되지 않을테니까 등의 온갖 성장 논리를 들먹이며 몸이 보내는 경고장을 애써 보지 않으려 한다.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몸에 대해서 이럴 진데 보이지도 않는 마음을 두고 너그러울 까닭이 있을까. 인간은 뇌의 발달과 동물적 감각을 등가교환한 대가로 오로지 눈을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 조차도 마음의 문이 꽉 닫혀 있으면 불 보듯 뻔한 고통에조차 공명하지 못한다.


이런 판국에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아픈 사람이라면, 정말 죽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되기 전에 스스로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굵고 튼튼한 밧줄을 던져 주는 게 어렵기만 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용기 내어 내 뱉는 한 마디 말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중환자실행은 면할 지도 모른다.




혹자는 그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별 것도 아닌 일에 징징거리는 걸지도 모르는데 왜 내가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야 하나. 그럴 때는 강아지가 되면 된다. 충분히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들처럼 고통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투명한 마음으로 찬찬히 상대를 바라보면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는 순간이 온다. 그럴 용의가 없다면 그냥 ‘그렇구나.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하고 내버려 두면 된다. 굳이 애써서 타인에게 네게 우울할 권리가 있는지 내가 판단해 주겠다며 싸움을 걸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왜 소중한 에너지를 잘 알지도 못하는 대상에게 쏟아 붓는가? 그렇게 해서 얻는 게 과연 무엇인가?




나 또한 한때 내게 과연 아플 권리가 있는지 따져 물었다. 어른들 말대로 정말 배가 불러서 우울한 건 아닌지 염려했다. 감정에 빠져들 틈이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나는 배가 부르다. 심지어 감정적으로 힘들다는 이유로 여러 해 동안 방황하고 선택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누구나 이런 행운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지난 나날들에 감사한다.


하지만 배가 불러 우울할 뿐이며 부지런한 사람은 우울할 틈조차 없다는 비난 어린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힘든 마음에 틈을 주지 않으려고, 혹은 삶을 둘러싼 상황이 좋지 않아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하는 경우 아픈 마음은 잠시 자취를 감추고 있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카페인으로 수혈하며 워커 홀릭으로 지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듯 아픈 마음을 쳇바퀴 같은 일상 아래 눌러 놓고 산다 해도 쌓인 감정이 밖으로 터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꾹꾹 눌러 참아 온 마음은 갈 곳을 찾지 못하여 가족 등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폭력이란 이름으로 쏟아지거나 내면으로 방향을 틀어 서서히 한 사람의 생명력을 갉아 먹는다.


마음은 존재의 핵을 이루는 부분임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이유로, 자본주의적 생산성을 높이는데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짐짝처럼 취급되기 쉽상이다. 그러다보니 마음을, 감정을 열등하게 여기는 태도가 사회 전반에 퍼져 마음을 표현하고 돌보는 법을 모르는 채로 성인이 된 사람들이 마음을 저울에 올려 무게를 잴 수 있는 물건쯤으로 여기게 된 건 아닐까. 정작 마음이란 여러 사람의 시각을 한 몸에 안고 다각도로 보아야 비로소 풍부한 제 모습을 드러내며, 손에 잡히는 실체가 없어 담기는 그릇마다 모양과 빛깔이 변하는 물과 같은 것인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마음을 잡아 놓고 무게를 달아 가격표까지 붙이려고 한다. ‘너의 마음은 아플 자격이 있는가?’하는 질문만큼 무의미한 질문이 또 있을까. 어차피 무슨 수를 써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인데 바로 지금 이 순간 아픈 감정에 만큼은 순수하게 솔직하면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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