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는 말은 우울증 환자에게도 해당된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중증에 만성 우울증 환자였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지적 왜곡이 심했고 강박적이고 반추적인 사고와 불필요한 피해의식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비록 진단은 서른이 되어서 받았지만 이런 여러 종류의 심리적 불편함을 느꼈던 건 이미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기억이 나기 시작했던 시절부터 세상살이는 늘 편하지 않았고, 아마 기질적 특성 때문이었을 그 문제는 약 10년간의 공교육 시스템을 거치며 차곡차곡 심화 되었다. 남은 고등학교 2년을 관두지 않고 끝까지 보냈다면 졸업장 따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가출청소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스무살이 넘어서도 지구에서의 삶은 우주복을 입은 채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처럼 불편했다. TCI(기질 및 성격 검사)에 의하면 자극추구와 위험회피가 모두 높은 나는 온갖 것에 흥미를 보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두려워했다. 수 없이 많은 것에 도전하고 싶었지만 어디에서든 조금이라도 위험 신호를 감지하면 공포에 사로잡혀 줄행랑을 쳤다. 덕분에 꽤 여러 기회를 놓쳤지만 당시에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한 행동들이었다.
2020년에 중증 우울증으로 진단을 받고 약 2년간 약을 먹었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해서 약을 먹어 상태가 호전 되었음에도 약이 아니라 내 노력 덕분에 나아졌다는 달콤한 생각에 쉽게 빠졌다. 이건 내 탓만은 아닌 것이 본디 인간이란 제 잘난 맛에 사는 존재인 것을 어쩌겠는가. 약 먹고 나아졌다는 것 보단 스스로 노력해서 역경을 이겨냈다는 이야기가 훨씬 남 듣기에도 그럴듯하고 내 듣기에도 좋으니까. 그럴 때마다 종종 약을 일주일치 혹은 보름씩을 빼먹었다가 예전 상태로 돌아가 의사선생님께 혼나곤 했었다. 몇 번 된통 당하고 난 후 절대 다시는 약을 빼먹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상황이 바뀌자 웬걸, 스스로에게 한 맹세 따위는 종잇장처럼 아무런 힘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또다시 보름치 약을 빼먹고야 말았다.
ADHD약을 처방받기 시작하면서 아침, 취침 전 하루에 두 번으로 약을 나눠 먹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사 오기 전 병원에서 약을 아침, 저녁으로 나눠 먹었기에 약 한 종류를 더 먹게 된 후에도 그 방법을 그대로 이어갔던 것뿐이었다.
ADHD약을 조금씩 늘려 갔다. 18mg, 27mg에서 36mg이 되자 기분 좋은 고양감이 느껴졌고 뭐든지 하고 싶은 의욕이 넘쳐났다. 뿌리 없이 표류하는 부레옥잠 같던 내가 어느 샌가 목표라는 걸 만들어 하루하루 달성해 나가며 뿌듯해하고 있었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 꾸준히 노력을 하고 오늘은 무얼 할까 하는 기대로 가슴 설레는 느낌은 적어도 내 기억 속엔 없었다. 그동안 뭔가 하고 싶어 의욕에 가슴이 부풀어 오를 때면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불안이 스멀스멀 몰려오곤 했었다.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에도 휩싸이지 않고 오롯이 설렘만을 느끼며 뭔가를 시도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평생을 함께 해왔던 예기 불안이란 녀석이 떨어져 나가자 세상이 달라보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의욕에 차 할 일을 찾고 목표대로 착착 진행 시키는 일이 나에게도 가능하다는 걸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았다. 나에게 있어서 콘서타의 효과는 우울증약보다 적어도 다섯 배는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샌가 점점 우울증약을 먹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건망증이었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아, 맞다’하며 덜 예민하게 해주는 약과 무기력함을 도와주는 약 두 알을 털어 넣고 침실로 들어가 불을 껐다. 아슬아슬하게 미션을 완수하는 날이 점차 늘어가면서 귀찮아하는 마음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하루 정도야 뭐...’ ‘이미 누웠는데 그냥 자자...’ 온갖 핑계를 대다가 어느 순간 그것마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보름 정도가 흘렀다.
덜 예민하게 해주는 약과 의욕 저하, 집중력 저하, 흥미 상실을 도와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약을 꽤 오랫동안 먹지 않았는데도 일상생활에 별 문제가 없었다. 어쩌면 콘서타만으로도 충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세상은 총천연색 무지개빛이었고 놀랍게도 노동이 즐거웠으며 나는 여전히 목표를 위해 차곡차곡 하루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잿빛으로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온 몸에 바벨을 주렁주렁 달아 놓은 것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피로했고 웃어야 할 일이 많은 직장에서 억지로 웃어대느라 입가에 경련이 일어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생생히 느껴졌던 기쁨이 이제는 의심과 불안에 가려져 그 빛을 잃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에너지를 얻어가던 날들이 무색하게도 다시 사람들이 나를 노려보고 욕하는 것처럼 느끼는 피해망상, 스스로가 무가치하다고 결론지어버리는 캐캐묵은 사고 회로가 아직 녹슬지 않은 바퀴에 기름칠을 해가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선생님께 약을 먹지 않은 것과 무기력증이 도진 것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을지 물어봤다. 이번 선생님은 뭐든지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 분이어서 이번에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정도로 답하셨다. 선생님의 말대로 100%는 아닐지도 모른다. 단순히 약 때문이 아니라 약을 먹지 않아 조금 약해진 상태에서 그 틈을 타고 들어온 촉발 사건이 나를 다시 냄새 나는 구렁텅이로 빠뜨렸을 수도 있다. 100% 완벽히 정확하게 확실하게 약 때문만 인지는 그 누구도 100%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약을 먹지 않은 내 상태는 정확히 약이 내게 줄 효과와 반대 되었다. ‘예민하고 무기력하며 어떤 것에도 쉽사리 흥미를 느낄 수 없음.’
우울증의 가장 엿 같은 점은 세상 살맛나게 하는 모든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재미난 감정을 다 제대로 누릴 수 없는데 오로지 슬픔과 좌절, 두려움과 공포 같은 것들만은 건강할 때보다 훨씬 증폭된 상태다. 도무지 아무런 즐거움을 느낄 수 없어 불닭볶음면에 청양고추를 대 여섯 개씩 때려 넣는 짓을 해보아도, 평소에 즐기던 게임 속으로 도망치려 해보아도 소용이 없다. 그런 짓으로 얻는 건 오로지 한 달치 위장병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마우스 질로 시간을 낭비했다는 자책감뿐이다.
생각 해보면 사람이 반드시 매일 즐거워야 할 이유는 없다. 어른들이 귀가 따갑도록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에는 즐거운 일보다 괴로운 일이 더 많다.’ 하지만 좋아하는 음식을 씹고 있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고 예전엔 배가 아파 눈물까지 흘려가며 봤을 웃긴 영상을 틀어놔도 입꼬리가 올라가기는 커녕 점점 무겁게 가라앉는 현상이 하루 이틀을 넘어 보름, 한 달을 넘어가면 슬슬 뇌가 이상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이따위로 살 거면 대체 사는 의미가 있긴 한 건가.’
사는데 의미를 따지는 건 인간밖에 없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강아지나 고양이가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것 같지는 않다. 강아지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비치는 건 오로지 녀석의 눈을 들여다보는 내 얼굴뿐이다. 입구에 검은 휘장이라도 두른 듯 쉽사리 읽을 수 없는 인간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개, 고양이가 찾는 건 오로지 먹이, 쉴 곳, 놀이, 제 발이 닿지 않는 곳에 마사지를 제공해 줄 인간의 손뿐이다.
하지만 그런 개, 고양이라 할지라도 먹는 것, 쉬는 것, 노는 것, 인간의 손길에서 아무런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면 무기력하게 바닥에 누워 흘러가는 세월만 보며 한숨으로 가득찬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그들이 ‘이따위로 살 바엔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진 않겠지만 분명 사는 게 따분해서 미칠 지경이긴 할 거다. 그러니 어쩌면 삶의 의미란 건 꿈을 이루는 따위의 거창한 게 아니라 그저 먹고 자고 싸고 노는, 생명체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아무런 장애물 없이 생생하게 느끼고 충족하며 사는 것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올해 또다시 심리 검사를 했다. 불안은 여전히 높지만 우울 척도는 중증에서 경도로 내려왔다. 우울함에 빠졌을 때에도 예전보다는 확실히 견딜만하다. 이제는 상태가 좋을 때의 내 모습을 알기 때문에 나라는 인간은 태생부터 잘못되어 영원히 고쳐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시원하게 빅엿을 날릴 수 있다. 그래서 가끔 약을 먹지 않고도 괜찮을 거란 착각에 빠지곤 하지만 여태껏 해온 모든 의도치 않은 실험은 실패했다. 언제쯤 약을 끊을 수 있을까란 질문은 왜 나에게 우울증이 생겼을까 라는 질문에 답할 때처럼 불확실하기 짝이 없다. 이럴때 할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추측에 추측에 또 추측밖에 없다. 삼년쯤 더 먹으면서 노력하면 안 먹어도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운이 좋으면 1년 후? 어쩌면 평생…….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몰랐던 시절에는 힘들이지 않고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마냥 부러워했다. 약이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조금씩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가는 나를 보며 이것을 과연 진짜 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원하지 않는데도 쉽게 우울하고 불안해지는 내가 싫으면서도 동시에 이런 나조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사랑 받는 세상에 대한 꿈을 꿨다. 약을 먹어 나아진 나라서 정상적으로 사회생활도 하고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면 약을 먹기 전의 ‘진짜 나’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인지 궁금했다.
심리 검사에 의하면 나의 우울은 만성적인 것이라고 한다. 최근에 생긴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 생성되어 감정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간을 이루어 온 것이다. 오래 묵은 상처들을 지금껏 데리고 살아오면서 남들 눈에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방법을 터득하려 애썼고 틈만 나면 불쑥 올라오는 부정적 심상들을 감추기 위해 어설프게나마 방패를 두르는 법을 익혔다. 어릴 적부터 늘 함께해 왔기 때문에 상담 치료를 받고, 약을 먹기 전에는 그 상태가 자연스러운 줄로만 알았다. 원래 삶이란 그토록 무겁고 인간관계는 늘 깨질까봐 두려우며 나는 타고나길 예민해서 영원히 가시를 두른 채 외롭게 살 줄 알았다.
약은 내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해주었다. 비록 내 의지로만 나아진 것이 아니라 멋은 안 나지만 약의 도움을 받으며 비로소 효율적인 노력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었다. 약이라는 선택지를 생각하지 못했던 나를 그 최첨단의 길로 끌고 간 전 남친 현 반려자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갔다면 아직까지도 허우적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에 왜 괜스레 약이 오를까. 아무래도 나는 제 잘난 맛에 사는 밥맛없는 놈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약이며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도 혼자 괜찮다고 믿고 싶은 모양이다. 매일 아침 꼬박꼬박 약을 먹는 모범생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자리에 앉아 글 쓰는 것조차도 힘들 만큼 무기력해 지는 나를 인정하기 싫은 거다. 어쩌면 이럴 때 필요한 건 이런 미치도록 부조리한 나조차도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만트라처럼 외고 다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참에 요가 수련자들처럼 어디 문신이라도 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무엇을 어디다 새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