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모든 사람들이 히초미씨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앉은 의사의 단단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혹스러움과 함께 약간의 분노가 밀려왔다. 나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줘야겠다고 작심한 듯, 그는 곧이어 열변을 토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모든 사람에게 미움 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이전에 나를 담당했던 선생님이 다른 곳으로 가시는 바람에 다른 선생님께 진료를 받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첫 만남에 요즘 기분이 어떤지 묻기에 스트레스 상황에 으레 그렇듯 타인이 나를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고 말했었다. 말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곧 그의 가르침이 이어졌다. 나를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애쓰는 그를 보며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네, 알죠.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을 수 없다는 거.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거.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나요?’
진료실에서 나와서 다음 진료 예약을 다른 선생님으로 바꿨다. 그 분의 선한 의도는 알겠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방식이라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위로 받으러 정신과에 오는 것은 아니지만 설교를 들으러 오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내가 쳐 놓은 마음의 경계선을 첫 만남에 침범해 들어왔다. 나는 나를 아끼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담당의를 바꾸는 것은 스스로의 보호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병원을 나오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머리로는 내 생각의 회로가 어딘가 잘못 되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너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말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미워할지도 모르며, 이미 미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틈만 나면 머릿속을 휘저었다. 하고 싶지 않아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나는 사람들의 시선과 표정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의지만으로 이 모든 걸 멈출 수 있다면 약이며 상담 같은 게 왜 필요할까. 그동안 들어왔던 위로를 가장한 교리 문답과 충격 요법이란 이름으로 쏟아졌던 무례한 언어들이 줄 지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내게 가르침을 주려 애썼던 그들도 자신의 문제를 의지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그들의 언어는 더 이상 내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지적했던 문제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대체 왜 일까?
몇 차례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을 보호하는 일의 중요성을 배웠다. 자학하지 않고 자신을 긍정하는 마음가짐, 부정적인 사고 회로에서 벗어나는 법을 훈련했다. 보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에 개미 눈꼽만큼이나마 조금씩 나아졌다. 약은 극적인 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상심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럼에도 마음 속 어딘가가 조금이라도 건드려지면 기다렸다는 듯 올라온 두려움에 쉽사리 휩싸이곤 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예전과는 달리 한 발짝 떨어져서 마음 상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낫기는 했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왜 이렇게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그 의사 말대로 모두가 날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지. 그걸 딱히 바라지도 않고. 게다가 몇몇이 날 싫어한다고 해서 인생이 망하는 것도 아니잖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원인이 있었다. 어릴 때 겪었던 몇몇 사건들이 내게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인간이 무리 동물이라는 걸 감안하면 한 때 무리로부터 고립되었던 내가 이성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공포를 간직하고 있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의 두려움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내게 피와 살을 물려준 조상들은 살기 위해 다른 인간들과 협력을 하며 살아왔고, 그들에게 있어서 고립이란 죽음을 의미했다. 그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나에게 과거의 사건은 생존의 위협에 다름 아니었다. 남들에게 미움 받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거의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일로 이토록 오랫동안 고통 받는 다는 것이 가끔은 신기할 때가 있다. 인간에게 고립, 추방의 공포란 엄청난 거구나 감탄이 나올 정도다. 때로는 영원히 기억 못하는 상태로 상처 부위만 싹 나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그 사건이 내게 영향을 미친다는 걸 인정하기 싫을 때도 많다. 그만큼 나약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나와 비슷한 일을 겪고도 당당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잘못도 없으면서 죄인처럼 사는 것 같아 스스로에게 미안했다.
연구에 따르면 트라우마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한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체질에 따라 병에 걸리는 사람이 있고 멀쩡한 사람이 있듯이 비슷한 일을 겪어도 후유증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내가 봤을 때는 별 것 아닌 일로 어떤 사람은 정신적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적 외상에 획일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각자의 지문 만큼이나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타인의 상처에 평균치의 기준선을 들이대선 안 된다. 우선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글쓰기는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제 3자의 눈으로 보는 연습을 할 수 있어 심리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쉼 없이 바뀌는 감정을 채집하여 글로 다듬어 내는 일이 어렵기도 하고, 생각과 감정이 언어가 되면 나중에 부끄럽게 여기게 될지도 모를 순간 순간이 박제 될 까봐 두려웠다.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이 정확히 반대인 현실을 묘사하는 순간 산산조각으로 부서질까 무섭기도 했다.
미움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글쓰기를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나를 깊이 알게 되는 사람들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싫어하기 될 거라는 헛된 믿음 때문에 관계에서 도망친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있지도 않은 손가락질이 두려워서 하던 일을 관둔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쇠 망치 앞의 쿠크다스 만큼이나 약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는 늘 한 발을 빼고 숨을 궁리를 했다.
글을 쓰고 세상에 내보내고자 한 건 더 이상 두려움 속에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어쩌면 걱정했던 대로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걱정 때문에 늘 피하기만 한다면 영원히 트라우마의 미로에 갇히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울고 웃고 옆 사람에게 기대기도 하며 생생한 삶을 살고 싶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만 보면 도망치고 숨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민물고기로 태어나서 바다 물고기의 삶을 꿈꾸고 싶지도 않다. 태어난 대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싶다. 트라우마가 끊임없이 딴죽을 건다면, 그 기회를 활용해 꼬리며 지느러미 근육을 단련하겠다. 물살에 휩쓸려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