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직장이라고들 하는 직장을 구하지 않은 이유

by 푸르른도로시


세상을 별 것으로 보려면 말끝마다 이 한마디를 붙이면 된다. ‘ㄴ~무엇인가?’

일이란 무엇인가? 일은 왜 해야 하는 걸까? 반드시 해야만 한다면 어떤 기준으로 직업을 골라야 하는가?

만약 일이 하기 싫다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대한민국의 여느 평범한 학생처럼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내 앞에 최소한 두가지의 선택지가 -학교를 가거나 가지 않거나 - 있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은 그저 남들처럼 평범한 학교에 들어가서 평범하게 공부하고 평범하게 졸업하기를 원했다. 불행히도 부모님이 그토록 바라셨던 ‘평범함’이 나에게는 ‘불가해함’이었다. 선생님은 질문할 필요조차 없는 일에 지나치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골칫덩어리를 ‘예민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A : 왜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는가?

Q :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A : 대학에는 왜 들어가야 하는가?

Q : 번듯한 직장을 구해야 하니까

A : 왜 번듯한 직장을 구해야 하는가?

Q : 남들만큼 살기 위해서

A : 남들만큼 산다는 게 대체 무엇인가?

Q : 남에게 체면 차릴 정도로 산다는 것을 말한다.

A : 남에게 체면 차릴 정도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Q : 수능을 잘 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간 후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된다고 한다.

A :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체면 차릴 정도로 살게 되면 행복해 질 수 있는가?

Q : 알 수 없다.


행복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그들은 만족스러운 삶을 살려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 괜찮은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부모님이며 선생님, 친척들까지 합세해 공통의 답안을 내놓았다. 공무원이 되면 평생 잘릴 걱정이 없어 마음을 푹 놓을 수 있단다, 간호사는 언제나 필요하니까 간호학과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직장을 가질 수 있을 거다, 여자 직업은 선생님이 최고지, 넌 책을 좋아하니까 사서가 되도록 노력 해보는 건 어때? 등등... 모두가 나의 젊음에 기대를 거는 것 같았다. 아직 어리니까 세월이 구만리 같으니까 노력만 하면 뭐든 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나는 대략 17년의 세월 동안 쌓인 데이터를 적극 활용하여 가지치기를 해나갔다.


1) 공무원(선생님, 사서 포함) - 시험을 칠 때마다 아는 문제도 지문을 잘못 읽어 틀리는 내가 감히 공무원 시험에 도전한다는 자체가 신성모독이다. 인간이란 모름지기 주제를 알아야 하지, 암. 그렇고말고. 패스!

2) 간호사 - 자기 몸 하나 간수 못하는 인간이 남을 돌본다고? (벌써부터 우리 아빠가 사랑해 마지않는 레퍼토리 “남들 다 하는데 너라고 왜 못하겠느냐”가 귓가에 메아리친다) 웃기는 소리!

3) 피아노 연주자 - 크게 신통한 재능이 없는 손가락도 길지 않은 사람이 그저 좋아한다는 이유로만 하기에는 국사 선생님 말대로 ‘이기적’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넌 왜 그렇게 이기적이냐. 너희 집 형편을 생각해야지.’


갖가지 이유로 거르다보니 결국 남는 직업이 없었다. 나름대로 적성에 맞을 것 같은 직업은 시험 머리가 아둔하거나 재능이 어중간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고, 가능할 것 같은 직업은 적성에 안 맞을게 뻔했다. 우리 아버지는 나더러 ‘허무맹랑한 꿈속에 사는 구제불능’이라 평했고, 한때 좋아했던 가정 선생님은 ‘너처럼 생각만 많은 사람이 나는 싫더라.’라고 했으며 공부 잘해서 사대에 간 덕에 우리 부모님의 호출을 받고 나의 단기 진로 코치가 된 사촌 언니는 ‘우리같이 평범한 외모에 물려받을 재산도 없는 평범한 서민 집 자식들은-특히 여자들은- 뼈 빠지게 공부해서 전문직을 가지는 것밖엔 답이 없다’고 했다.


세상은 그들 말이 현실적으로 옳다고 했고, 고작 태어난 지 17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는 그들의 말에 반박할 근거도 배짱도 없었다. 그럼에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퐁퐁 의심이 솟아올랐다. 어리석은 십대에게 현실의 쓴 맛을 가르쳐 주려는 자들에 대한 반발심에 불과했을 지도 모르지만, 나의 근거 없는 고집과 원칙은 ‘현실적으로’라는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우선, 그들은 나와 세포 하나하나까지 다른 타인이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를뿐더러 설령 잘 안다고 한들 나를 대신해서 가야 할 길을 정할 권리 따위가 그들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 그 ‘현실’이라는 사회 현상을 남들이 하는 말만 믿고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이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진리라고 해도 주는대로 덥썩 받기 보다는 직접 보고 듣고 맛보며 체득하고 싶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 걸 남의 말만 듣고 내 것이라 착각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어른들은 이런 나를 골치 아파 했다. 철딱서니가 없다고, 배가 불러 저런다고 했다. 세월이 훌쩍 흐른 지금, 후자에는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평생을 성실히 일해오신 부모님 덕분에 빚도 없고, 대체로 건강하다고 할 수 있는 몸 덕택에 숨만 쉬어도 돈이 새어나갈 일이 없으니 이런 사치스러운 생각도 할 수 있겠지. 전자에는 여전히 물음표를 던진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직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그것에 관해 이런저런 의문을 뱉어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더군다나 나는 십대 후반의 청소년이 아니었던가. 곧 성인이 될 젊은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게 더 부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본디 그들이 해야 할 일이 홀로 서기를 연습하는 것인데.


십대 때는 그래도 어리다는 이유로 많이들 봐주었다. 여전히 기대를 놓지 못해 들기름 볶듯 달달 볶긴 했지만. 진짜 문제는 그 후였다. 이십대가 넘어서도 이 태도를 유지하자 사람들의 불안에 찬 비난이 쏟아졌다. 미대를 졸업한 후 그 이름도 자유로운 프리터(freeter)가 된 나에게 어머니가 디자인 회사 취직이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꽤 괜찮은 중소기업이라고, 나중에라도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려면 돈이 필요 할 테니 일 하면서 집에서 출퇴근하며 돈을 모으라고 하셨다. 번개같이 거절하진 않았다. 적어도 디자인 업무란 게 무언가 열심히 탐색해보았다.


어머니께 ‘노’라는 대답을 내놓자 ‘남들은 다 하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적성에 안 맞아도, 하기 싫어도 다 참으며 일 한다고. 내 나름대로는 디자인 회사를 거절한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ADHD라는 이름을 새하얗게 몰랐음에도 나는 내 주의력이 형편 없음을 알았다. 심지어 ‘주의력’이라는 단어조차 몰랐음에도 디자인 회사에서 꼼꼼함과 세밀함이 요구되는 작업을 하며 수도 없이 욕을 들어 먹고, 매일 아침 눈 뜰때마다 오늘 하루도 뭔가를 거하게 망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피가 마를 내 모습이 시력이 10.0인 사람이 멀리서 다가오는 맹수를 보듯 생생했다.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싼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무슨 욕을 얼마나 더 들어 먹는다 해도 마음속에서 오케이 싸인이 떨어지지 않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평생을 들어온 일머리와 관련한 욕이 너무 많아서 의지박약에 환상 속에 사는 녀석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생명력을 야금야금 갉아 먹히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 나는 일머리에 관해서 수도 없이 많은 지적을 받아왔다. 1박 2일 수련회에서 유치원 선생님이 말했다. “다른 애들은 다 알아서 잘 하는데 너는 왜 남들 일어날 때 눈 뜨는 쉬운 일 하나 제대로 못하니.” 학교에서 단체로 부채춤이라도 연습하는 날에는 사방에서 욕이 바가지로 날아 올 각오를 해야 했다. 눈치 없이 박자를 놓친 나 때문에 모든 동작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복싱 체육관 관장이 그랬던가. 복싱을 잘 하려면 맞아 보며 맷집을 키워야 한다고. 내가 먹은 욕은 그러나 맷집을 키우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날아오는 주먹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정없이 날아오는 각기 다른 강도의 펀치를 헬멧도 쓰지 않은 채 고스란히 버텨내고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이유 없이 맞아 본 사람은 아무리 맞아도 맷집이 세지지 않는다. 오히려 남들은 눈치 채지도 못할 작은 움직임에도 놀라 벌벌 떨게 마련이다. 자신에 대한 변을 하자면, 나는 잘 훈련된 복싱 선수가 아니라 무방비 상태로 맞으며 자라 조그만 자극에도 두려움에 떠는 사람에 가까웠다. 비난과 지적에 정말이지 넌더리가 났고,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받고 싶지 않았다.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딱 먹고 살 만큼만 돈을 벌었다. 주로 마트에서 판매 및 시식 일을 했다. 비싼 돈 들여가며 대학 졸업 시켜놨더니 전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다 미래마저 보장되지 않는 일을 한다고 부모님이 너무나 속상해하셨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큰 책임을 지는 게 너무나도 두려웠다. 책임감이 높은 자리에 갈수록 작은 실수 하나가 큰 영향을 미칠 터였고 돌아오는 욕도 무더기로 커질게 분명하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책임이 작은 일을 하며 맘 편하게 사는 게 나았다.


마트 시식 일은 힘들긴 했지만 일 자체는 비교적 단순했다. 내 할 몫의 일만 해내면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고 우스꽝스러운 유니폼 때문에 쪽팔렸던 걸 제외하면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멀티태스킹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라 해야 할 일 몇 가지에만 집중 하면 되는 점이 좋았다. A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B와 C와 D를 하라고 한꺼번에 내려오는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일이 조금만 복잡해지면 머리속이 새하얘지는 나조차도 성실히 일하는 유능한 일꾼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진상 손님 때문에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시식대 뒤에서 펑펑 울던 적도 있었지만 적어도 일 자체만 따지자면 내 선에서 통제가 가능했으며 무엇보다도 책임의 소지가 적다는 점에서 새가슴인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일의 단순함에 지극히 만족하기만 했다면 별 고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먹고 자고 입는 일이 해결된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나에게도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었다. 마트 일은 자아 실현과 거리가 먼 일이었다. 게다가 일 못 한다고 욕을 먹진 않았지만 자기 아이한테 한소리 했다는 이유로-그 아이가 시식대를 흔들어서 못하게 말렸다- 처음 본 낯선 여자에게 쌍욕을 먹어야 했고, 되도 않은 시비를 거는 사람은 기본이요, 때때로 술 한 잔 따라보라는 듯 껄렁대며 시식 컵을 들이는 익명의 중년 남자에게 인격적 모독을 당해야 했다. 이쯤 되자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사람 취급을 받으려면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는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다시는 마트 일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몇몇 일을 했다. 다행히 나의 평범한 둥근 얼굴이 교육업계에서는 긍정 신호로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대체로 파트타임 일을 했지만 가끔 풀타임으로 일할 때도 있었다. 문제는 내가 그들의 교육 철학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였다. 다섯 살 아이들에게 등원하자마자 공부를 시키고 점심시간에도 덜한 분량을 하도록 요구하는 방침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알고 들어갔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했다. 아이들이 가엾진 않았다. 원에서 제공하는 풍부한 인풋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아웃풋을 뱉어내면서 아이들은 사회가 원하는 똑똑한 인재로 자랄 터였고 어쩌면 그들 부모가 기대하는 대로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만족스러운 인생을 보낼 터였다. 내가 할 일은 그저 보스가 시키는 대로 그 아이들을 프로그램 속에 집어넣는 일이었고,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쳐내느라 힘들긴 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할 수 있었다면 엄마 말대로 남들처럼 꾹 참고 버틸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일을 거듭하면 할 수록 고용주의 교육 철학과 운영 방침에 동의할 수 없었고, 동의할 수 없었기에 그 일은 내게 아무 가치가 없었다. 의미 없는 일을 매일 반복하는 것은 돈을 준다는 이유로 독약을 억지로 삼키는 것과 같았다. 나는 아이들이 맞이할 것이라 기대되는 성공적 미래에 대해서는 일체의 관심도 없었다. 그저 그 아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놀 기회를 빼앗기는 모습을 보며 온 마음이 괴로웠을 뿐이었다. 아이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놀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점심 먹고 남은 15분 정도가 다였다. 그마저도 각종 대회 준비며 나머지 학습 등을 이유로 빼앗아야 할 때면 쥐꼬리만한 월급에 영혼을 판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옳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팔 다리가 저렸고 시시때때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결국 아프다는 이유로 일을 그만뒀다. 남들처럼 싫어도 꾹 참고 일하는 것에 실패한 후 나는 다시 프리터 생활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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