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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시언니 Dec 05. 2019

치마 입고 밤길을 걷는 건 만져도 된다는 뜻이야?

네 잘못 아니야. 그 누구도 너를 만질 자격은 없어(2)



<선배>




선배.

내가 전날 밤 당한 일에 관해 듣고 너무 놀라 달려오던 선배의 표정이 기억나요.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한시라도 빨리 나의 안위를 묻고 싶어 하던 다정한 걸음이었어요.


그런 선배를 보고 저는 울음이 터졌어요.

어제도 오늘도 한 방울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었어요.

나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어요. 아이처럼 울었어요. 오랫동안 울었어요.

멈춰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내가 울었던 건......

선배의 다정함 때문이 아니었어요.


남자가 나를 향해 뛰어왔기 때문이었어요.


아는 얼굴 인대도, 누구보다 따뜻한 눈빛 인대도, 나는 무서웠던 거예요.

누군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에 너무 놀랐던 거예요.

뒤에서 뛰어오는 위협적인 발걸음 소리가 아니었는데도 말이에요.

그 후로도 나는 오랫동안 ‘사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어요.


당장 사건 다음 날부터 공포는 시작되었어요.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집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문을 여는데 까지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어요.

대중교통을 타고 일터로 갈 때도 마찬 가지였어요. 사람이 꽉 찬 지하철 4호선에서는 앉아서도 서서도 수시로 뒤를 돌아봤어요. 동료 언니가 내 어깨를 톡톡 치며 이름을 불렀을 땐 까무러쳐 넘어졌고요. 친구나 가족이 옆에 없이는 거리를 혼자 걷지 못했어요. 내가 하도 수시로 뒤를 쳐다보니까 엄마가 내 뒤에서 걷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나는 뒤에 있는 사람이 엄마라는 걸 알면서도 삐죽삐죽 머리가 섰어요. 다시 엄마는 옆으로 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작은 소리에도 놀라 우는 나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어요. 어쩌다 혼자 밤길에 있게 되면, 특히 노란 가로등이 있는 곳이면 발바닥이 땅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기도 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조금씩 나아졌어요. 선배는 꽤 오랫동안 그때 일로 내가 괜찮은지 물어봐 주었어요. 고마워요 선배.     








< 여자들>


내가 이 일을 털어놓았을 때, 혹은 어떻게든 나의 이야기가 흘러들어 갔을 때.

그때 비로소 많은 분들이 자신의 경험담도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우리가 서로를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이 사람은 나를 비난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내가 만난 거의 모든 여성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건 아주 위험한 이야기였고 겪지 않아도 될 경험이었습니다.


자취방에 침입해 옆에 누운 범인.

출근길 문을 열자 밖에서 밀치고 들어와 전화기 줄로 묶어 놓은 범인.

차에서 내릴 때 흉기를 들이밀고 차에 따라 오른 범인.

집에 따라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겨우 방으로 도망쳐 문을 잠겄는데

그 문을 부시기 시작하던 범인.

화장실 밖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정액을 뿌리고 도망친 범인.

뒤에서 가슴을 만지고 간 범인.

뒤에서 성기를 부비 던 범인.

듣다 보면 이야기는 중간에서 애매하게 결말을 맺곤 했습니다.

그 뒤는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녀들을 말했습니다.



어디 가서 말하지 못했다고.

내가 죄인인 것 같았다고.

창피했다고.








<9. 친구>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어.

나는 왜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을까?

나는 왜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고 있었을까?

왜, 나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네가 말했어.

“왜 안돼? 그 시간에 거기 있으면 왜 안돼?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으면 왜 안돼?

네가 그 시간에 거기서 치마를 입고 걸으면 그건 널 만져도 된다는 뜻이야? “

너는 덧 붙였어 말했어.



“어떤 시간에 어떤 거리를 걸어도, 설령 네가 발가벗고 걷는다 해도,

그 누구도 너를 만질 자격은 없어. “
















글/그림 : 두시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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