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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람 Nov 14. 2019

목화와 가죽, 그리고 밀 - ①

낯선 파리의 표정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마치 여섯 시 반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여섯 시 반. 열한 시 결혼을 앞둔 사람 치고 이른 기상 시간은 아니었다. 9시 45분에는 집을 나설 계획이었기 때문에 눈을 뜨자마자 고데기를 잡았다. 욕실 문을 여니 전날 밤 주름 좀 펴보자고 걸어둔 심플한 크림색 드레스가 살랑거린다. 이걸 입고 클로드와 가족이 되는 건가. 감상에 잠길 틈은 없었다. 시간도 없었지만 절절 끓는 고데기를 손에 쥐고 딴생각을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으니까. 특히 귀나 목덜미에 선명한 고데기 자국을 자랑하며 식장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다이소에서는 천 원이면 될 꼬리빗을 프랑프리에서 7유로나 주고 샀다. U자 헤어핀은 또 어떤가. 이놈의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다 비쌌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생활도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신속히 전신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아낸 후 넥타이를 든 클로드와 자리를 바꿨다. 햇살이 잘 드는 욕실 앞 복도를 제외하면 우리 집에 전신 거울이 있는 곳은 달리 없었던 탓이다. 내가 작은 거울 앞에서 글리터를 더 얹니 마니, 음영을 더 주니 마니로 끙끙대는 동안 클로드는 익숙지 않은 재질의 넥타이와 씨름했다. 화장이 망가지지 않게 손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크림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후에는 머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결혼반지와 신분증은 몇 번이나 확인해 가며 챙겼는데도 어찌나 불안하던지, 가방을 몇 번이나 열어보았다. 9시 45분. 게으른 우리가 이 시간에 때 빼고 광낸 모습으로 집을 나서다니. 우리도 하면 되는 사람들이었나 보다.


 일주일 전부터 일기 예보를 확인했기 때문에 쾌청한 날이 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쨍쨍했다. 그 날카로운 햇살 아래를 클로드와 함께 걸었다. 거칠기로는 프랑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파리의 운전자들이 우리를 위해 정차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경적을 울리지도 않았고, 인상을 찌푸리며 빨리 가라는 손짓을 해오지도 않았다. 스치는 바람까지 상냥했던 이날의 파리를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첫 번째 꽃집의 만행 때문에 곤두서 있던 마음은 구청 앞 꽃집의 아름다운 카라 부케 앞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실크 리본으로 단단히 고정한 다발을 힘주어 붙잡았다. 구청으로 가는 매 걸음이 긴장을 부추겼다. 도둑 결혼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나를 보러 올 하객들 때문에. 게으른 나와 클로드가 졸린 눈을 부벼 가며 꽃단장을 한 것도, 우리가 며칠이나 머리를 맞대고 청첩장을 꾸민 것도 다 1시간 뒤에 있을 결혼식 때문이라는 것이 당일 아침에야 실감이 난 것이다. 긴장 때문에 손에 땀이 찼다. 이렇게 땀에 젖은 신부가 될 바에는 차라리 우버를 잡아탈 걸 그랬다는 생각도 했지만, 클로드의 친구인 야엘이 우버를 탔다가 교통 정체에 갇힌 것을 생각해 보면 식장까지 걸어가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정체에 갇힌 것은 야엘뿐이 아니었다. 다들 도로에 갇힌 탓에 우리는 구청 앞에 서서 누군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예정대로라면 식이 열리기 30분 전에 야엘이 도착하여 사진을 찍어줬겠지만 처음 찾아간 꽃집의 부케가 그랬고 클로드의 이발사가 가진 수전증이 그랬듯 가끔은 세상 일이 우리 마음 같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게 하필 결혼식 날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신기하게도 초조함은 없었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하도 많은 일이 있어서였을까. 이 좋은 날에 이 멋진 사람의 손을 잡고 있는데 화낼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일이 마음대로 돌아가는 일보다 많은 기묘한 날이었고, 또 이상할 만큼 행복했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우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건 내가 아는 파리가 아닌데. 맑은 날에도 회색이고, 사람들은 지쳐 있고. 운전자들은 언제나 살짝 미쳐 있는 게 내가 아는 파리였는데. 이날의 파리는 로맨스 소설 속의 세상이라도 되는 듯했다. 사람들이 우리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짓다니,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부터 꿈에 빠져 있었던 거지? 사실 나는 여섯 시 반에 일어난 적이 없고, 지금은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게 아닐까.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지만 불안이 엄습했다. 우리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곁에 서있던 중년 여성이 물었다. '사진 찍어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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