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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람 Nov 14. 2019

목화와 가죽, 그리고 밀 - ④

너를 잘 아는 사람들이 옳다

 비록 한참을 상의한 테이블 배치를 의논도 없이 변경해 뒤통수를 친 것은 실망스러웠지만 음식은 만족스러웠다. 클로드가 상사의 미운 짓을 진화하러 갈 때면 나는 가족 테이블에 혼자 남아야 했는데, 어른들은 재치 있는 농담으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 노력하셨다. 내가 여섯 시 반에 일어나서 머리를 했다고 말하니 클로드의 외할아버지는 당신께서도 다섯 시 반에 일어나셨다고 빙그레 미소 지으셨는데, 시어머니인 버나뎃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빠는 다듬을 머리카락도 없고 화장도 안 하셨는데 왜 일찍 일어났어요?'라고 물었다. 외할아버지는 노여워하는 기색 없이 너털웃음을 터트리셨다. 나중에 듣기로는 양가 조부모님께서 만난 게 클로드 조부모님의 결혼식 이후로 처음이란다. 각자 사시는 곳이 각각 남부와 서부로 아주 멀긴 하지만 적어도 30년은 만나지 않았다는 의미이니 놀라웠다.

 


 부지런히 농담을 던지시는 외할아버님과 달리 외할머님은 조용한 성정이셨다. 하지만 한 번씩 던지는 농담이 무척 재미있었고, 그럴 때의 할머님 표정은 무척 담담했기 때문에 더 웃겼다. 할머니는 첫 번째로 찾은 꽃집에 관해 불평을 늘어놓는 우리에게 '마침 정원에 흰 카라가 피었는데, 그 양반들한테 갖다 줘야겠다. 근데 한 송이밖에 없어.'라고 조용히 말씀하셨고, 만찬 시작 전에 탄산수와 생수 중 무엇을 드시겠냐고 묻는 서버에게는 진지하게 '물은 필요 없어'라고 말씀하셨다(오직 와인과 샴페인만 드시겠다는 의미였다). 만찬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결혼반지로 옮겨 갔다. 시어머니인 버나뎃은 결혼반지를 맞춘 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 손가락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셨고, 외할머니는 '내가 옛날에 수술을 할 때 의사가 반지는 빼야 한다지 뭐냐.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지가 않아서 반지 위에 붕대를 둘둘 감고 수술장에 들어갔단다.'라고 하셨다. 결혼식 전에 만나 뵌 외할머니는 말씀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툭툭 내려놓는 농담이 재미있는 분일 줄은 몰랐다.


 메뉴에 있는 오리 요리 앞에 Challons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이 Challons이 뭐냐고 묻자 클로드의 할아버님이 '우리가 차를 몰고 지나온 도시 중 하나란다, 만찬에 쓸 오리를 주워오느라 좀 늦었다.'라고 하셨다. 이 어르신들은 농담을 단련하는 문화 센터에라도 다니고 계신 것인가, 덕분에 클로드 없이 앉아 있는 시간이 어렵지 않았다.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는 행사를 준비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미숙한 점이 조금 있었는데, 내 옆에 앉아 계시던 할머님이 참치회 무침 앞에서 식기를 내려놓으시며 입맛에 안 맞다고 하셨을 때는 조금 더 신경 쓸걸 싶었다. 다행히 다른 음식들은 잘 드셨고, 다른 손님들도 음식을 칭찬하며 떠났기 때문에 이 즈음부터 긴장이 조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마 식전주와 와인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클로드의 할아버지가 주워오셨다는 '그' 오리에 마늘잎이 곁들여져 나왔다. 마늘잎이 잘 구워져 바삭바삭했다. 명이나물 칩 같은 게 나온다면 이런 맛이지 않을까. 하긴, 명이나물도 산마늘이니까.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잠시 잊어버렸지만 퍽 쓸쓸했다. 축하받고 싶은 사람들을 다 데려올 수 없었다는 게.

 


 클로드의 상사가 모든 미운 짓을 마치고 떠날 것을 선언했을 때, 오스카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클로드를 부르러 왔다. 인사하러 가던 클로드가 다시 가족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나는 '상사가 또 나를 불렀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아저씨들이란 국적을 불문하고 그런 법인가. 다시 찾은 문제의 테이블에는 클로드 상사의 투정이 한창이었다. '신부 불러오기 전까진 안 가!'라면서. 내가 다시 테이블을 찾자 클로드의 상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껏 어른스러운 얼굴로 '클로드는 좋은 남자입니다. 이 결혼은 잘한 일이에요.'라고 했다. 어라, 오피스 허스 밴드 운운하던 사람은 어디의 누구더라. 클로드는 취기 어린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람,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널더러 결혼을 잘했다고 하고,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널 찾은 게 행운이라 말해.'


 여기서 불쌍한 오스카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오스카와 클로드는 회사에서 만난 사이였다. 클로드야 본인 결혼식이니 회사에 돌아갈 필요가 없었지만 오스카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취한 클로드의 상사를 어르고 달래는 것은 그야말로 술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스카가 식당을 나설 때 그는 완전히 취해 있었다. 여기에는 옆에 앉은 오스카에게 자꾸만 술을 권한 클로드 상사의 탓도 컸다. 결혼식 다음날 회사로 돌아간-서로 일이 바빴기 때문에 3주의 신혼여행은 결혼식을 치른 지 세 달 후에 갔다- 클로드는 전날 오스카의 행적을 생생히 전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오스카가 타고 올라온 엘리베이터가 반나절 동안 강력한 술냄새를 풍겼고, 평소에 과묵하기로 이름난 오스카의 상사가 '미안하지만 풍선껌을 좀 씹는 게 좋겠어'라고 한마디를 했다는 이야기들 말이다. 불쌍한 오스카, 그날의 오스카는 두 말할 것 없는 결혼식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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