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이 있는 풍경
결혼식이라는 이벤트가 모든 신부에게 그렇듯, 아마 이 날이 내가 예쁘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은 날이었을 것이다. 예산을 조금 웃돌았지만 결혼인데 고작 50유로 더 못 쓸까 싶어 눈을 질끈 감고 산 드레스도, 집에서 낑낑대며 고쳐 입은 보람이 있었는지 칭찬을 많이 받았다. 온 도시가 우리를 사랑했고, 나는 조금 더 있으면 칭찬에 파묻힐 참이었다. 파리에서 사는 매일이 이랬으면 좋겠다고 실실 대다가도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매일이 이렇게 좋기만 하면 조금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불헌듯 들었던 것이다.
양가 조부모님은 이미 뵌 적이 있었지만 다른 친지들을 만나는 건 결혼식날이 처음이었다. 전체 하객이 채 50명이 되지 않을 만큼 조촐한 결혼식이었지만 사진 찍으랴, 인사드리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결혼식이 끝났으니 이제 미식 잡지들을 뒤져 가며 선발한 레스토랑에서 우리의 선택을 검증할 차례였다. 고맙게도 클로드의 친구들이 카메라를 한 대씩 챙겨 온 덕분에 사진을 많이 받을 수 있었지만 전면에 보이는 카메라만 다섯 대는 되는지라 식 이후의 분위기는 레드카펫 취재 열기를 방불케 했다. 다음날 받은 사진들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르신들이 모두 다른 렌즈를 보고 계셨다. 이 사진을 언제 다 정리하나 싶어 멍해지던 찰나, 유독 눈길을 잡아끄는 썸네일이 있었다. 클로드가 기어코 웨딩 사진에 장난을 친 것이다.
클로드는 결혼식 며칠 전부터 할머님께 Deb dance, 2-3년쯤 전 클럽을 쓸고 지나간 뎁 동작을 시킬 거라고 장난스럽게 말하곤 했다. 굳이 장난질에 할머니를 끌어들여야겠냐는 나와 다들 좋아할 거라던 클로드의 실랑이는 어디까지나 농담의 선을 넘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거늘. 그나마 같이 뎁을 한 것이 할머님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해야 하나, 아니면 모처럼 한껏 멋을 낸 결혼식 자리에서 개그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무라야 하나. 나는 프레임 속에서 뎁 동작을 취하고 있는 야엘과 클로드, 실뱅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듣자니 실뱅과 야엘은 게임 포트 나이트에 나오는 춤을 추고 싶어 했다나. 그래도 뎁이 포트 나이트 춤보다는 낫지 않냐는 클로드의 뻔뻔함에 하려던 말들이 쏙 들어갔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줄 맨 끝에서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50명의 하객들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이 내 결혼 때문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식도 다 끝났으니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속 끓일 일은 이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레스토랑은 우리가 오픈 전에 도착했다면서 5분 넘는 시간 동안 하객들을 기다리게 했다. 아니, 그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히 홀 매니저와 좌석 배치에 대해 충분히 상의를 했는데 문 열린 레스토랑에서 우리를 맞이한 건 다른 결혼식 테이블 배치와 바뀐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낯선 모습이었다. 게다가 클로드의 친구 몇은 미리 알려주지 않고 다른 친구를 데려오는 바람에-미리 알려 줘야 레스토랑에 음식을 더 준비해 달라고 할 테니- 클로드는 땀만 뻘뻘 흘렸다. 흘리는 땀만큼 클로드의 두뇌가 팽팽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다. 결국 즉석에서 좌석 배치를 바꾼 클로드가 하객들을 자리로 안내했고, 겨우 만찬을 시작할 수 있었다. 메뉴판에 우리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만찬이 끝날 때쯤 클로드의 할머니께서는 메뉴 하나에 셰프의 사인을 받아 우리에게 주셨는데, 프랑스 결혼식에서는 원래 이렇게 하는 거라고 말씀하시며 한쪽 눈을 찡긋 하셨다.
클로드의 폭군 상사는 '여기! 신부 얼굴 좀 보여주지!!'라며 어디 60년대 한국 영화에나 나올 법한 꼬장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분의 존재로 테이블 배치의 난이도가 확 올라갔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상사의 테이블에 앉힐 사람들은 이 상사의 성격이 어떤지 알고 있어야 했고, 어느 정도 이 사람의 폭주를 달랠 수 있어야 하며, 사태가 너무 악화될 시 클로드에게 와서 귀띔을 해줄 수 있을 만큼 눈치가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여기에 적격인 것은 불행히도 결혼식의 통역을 맡아 준 오스카였기 때문에, 우리는 불쌍한 오스카를 클로드의 상사 옆에 앉힐 수밖에 없었다. 가엾은 오스카, 이 결혼식에서 우리 다음으로 열심히 일한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오스카다.
클로드의 상사는 극렬 우파임을 자랑스러워하는 편이었고,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우리 친구들은 거의 좌파였다. 그래서 혹시라도 누구 하나 기분 상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생각과는 달리 만찬 시간 내내, 그 테이블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물론 행복해서 웃은 것만은 아니었고-. 심지어 우리는 클로드의 상사와 극렬 우파인 실뱅이 베프가 되어 수다를 떠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클로드의 상사가 얌전히 만찬을 즐겼던 것은 아니다. 그는 '셰프가 충분히 간을 했기 때문에 더 소금을 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는 서버에게 됐고 소금을 가져오라며 짜증을 냈고, 메뉴에도 없는 감자 튀김을 만들어 달라고 까탈을 부리기도 했다-당연히 이것들은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다-. 그 뿐이면 좋았을 것을 몇 번이나 레스토랑 안에서 담배를 피우려 하기도 했다. 불쌍한 오스카만 분노한 서버와 더 분노한 클로드의 상사 사이에서 중재를 해야 했다. 이것은 우리가 레스토랑을 떠나기 전 서버에게 사과하고 위로의 팁을 전달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다행히 클로드의 상사는 만찬이 끝나기 전에 돌아갔다. 떠나기 전에 '클로드는 나의 오피스 허스밴드이지만 가정에서는 당신의 남편이니 우리 클로드를 잘 공유해 봅시다'라는 매우 이상한 말을 농담이랍시고 남기지만 않았어도 그를 훨씬 나은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날 만찬에 뒤풀이까지 마치고 엉망진창으로 취해 누운 클로드에게 '어이, 오피스 허스밴드'라고 했더니 클로드는 몸서리를 치며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