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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람 Nov 14. 2019

목화와 가죽, 그리고 밀 - ②

프랑스가 나의 경조사에 미친 영향

 쑥스럽긴 했지만 사진을 찍어주기로 한 야엘도 늦는 판이라 염치 불구하고 사진을 부탁했다. 사진을 찍어주고 멀어져 가는 중년 여성의 뒷모습이 그렇게 뿌듯해 보일 수 없었다. 구청 앞 광장에 걸어 들어올 때만 해도 이미 긴장한 상태였는데, 우리의 친구와 클로드의 가족들이 우리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오고 있다 생각하니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떨렸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클로드의 부모님이었다. 식까지는 30분이 채 남지 않은 상황이라 시아버지인 르네가 카메라를 잡았다. 시어머니인 버나뎃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내 팔을 잡고 어떻게든 풀어 주려 노력하셨지만 버나뎃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이른 아침이라 구청 앞 공원에는 사람이 없었다. 시부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메라 앞에서 클로드와 뽀뽀를 하고 포즈를 잡는 것은 어색하다면 어색한 일이었지만 당장 20분 뒤면 닥쳐올 결혼식에 대한 공포가 모든 것을 잊게 했다.



 사진을 찍는 동안 클로드의 외조부모님과 친구들이 도착했다. 르네는 익숙지 않은 카메라와 씨름했고, 덕분에 우리는 정신없던 결혼식 전의 시간을 기록할 수 있었다. 결혼식이 다 끝난 후에도 긴장은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날은 미처 몰랐지만, 어서 입장할 것을 재촉하던 구청 측의 공무원이 모든 사진에 찍혀 있지 뭔가. 무슨 심령사진처럼 말이다. 보정할 사진을 고르다가 이 아저씨를 지우기 위해 포토샵을 배우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식이 끝난 지 며칠이나 지난 후의 이야기다.


 긴장으로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갔지만 나비처럼 경쾌하게 팔랑대는 클로드 할머니의 모자가 귀여워서 주의를 돌릴 수 있었다. 내가 외국인인 탓에 식순을 통역해 줄 사람이 하나 필요했다. 다행히도 전문적인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어서, 클로드의 친구인 오스카가 통역을 해주기로 했다. 숲처럼 수북하게 자란 오스카의 수염 너머로 긴장한 기색이 풍겼다. 그래, 나만 긴장되는 건 아니니까. 긴장한 이들의 연대는 식장으로 들어가는 매 걸음에 단단히 다져졌다. 먼 곳에서 오시는 클로드의 조부모님께서 교통 정체에 갇힌 탓에 식은 10분 정도 지연되었다. 그 때문일까, 강경한 태도로 통역사를 지정해 오라던 구청은 오스카가 통역할 만한 시간을 전혀 주지 않았다. 그렇게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말이다.


 '네'가 아니라 'Oui'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먼저 성혼 선언문에 사인을 했고, 다음으로 증인을 맡은 야엘과 내 친구 이네스가 사인을 했다. 30분이면 끝날 거라던 클로드의 말처럼 구청 결혼식은 어느 공장식 웨딩 부럽지 않게 신속히 끝났다. 도둑 결혼에 따라올 외로움은 이미 각오한 바였기 때문에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못 견디게 내 가족이 보고 싶었다. 아버지가 보고싶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심심하면 나를 내버리지 않은 진짜 가족 말이다. 늘 외로움이 깊지 않은 성격이라 자부했는데, 몇 안 되는 내 친구와 클로드의 가족들 사이에서 이날만큼 외로운 적은 또 없었다. 뭔가를 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은 다 허상인가 보다.

 


 19구의 구청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는데, 마치 동굴처럼 만들어진 둥근 아치 사이로 곧게 뻗은 대리석 계단을 보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위에서 언급한 구청 측 결혼 공무원은 사진과 무슨 원수라도 졌는지 필사적으로 앵글 안을 사수했다. 장소가 구청 밖이든 안이든 이 남자의 투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표정이라도 좀 부드러웠다면 하객들 사이에 묻어갈 수 있었을 텐데 시종일관 소도둑 같은 표정으로 앵글 안에 머무르는 바람에 소위 말하는 신 스틸러가 되고 말았다. 그는 대체 무슨 딱한 사정이 있어 신혼부부의 사진 속을 떠나지 못하는지 살풀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며칠을 고심해서 고르고, 또 정성을 들여 고친 크림색 드레스가 19구 구청의 묵직한 색감에 잘 녹아들었다. 식만 끝나면 마법처럼 긴장이 싹 풀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다만 식이 끝나고 나니 19구 결혼식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서, '이 정도면 강남에서 난다 긴다 하는 하우스웨딩 인테리어 정도는 제치겠는데' 등의 속물적인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 순간이, 프랑스에 내게 '세금 낸 값'을 해준 첫 순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사회보장보험 같은 혜택도 없지야 않지만. 인간관계의 끈끈함도 경조사에서 빛을 발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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