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람 Nov 14. 2019

결혼 전야

흰 카라 부케

 루이 르 그헝 가의 꽃집에서 전화가 왔다. 사흘 전에 주문한 흰 카라 부케를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거였다. 주문할 때부터 웨딩 부케라고 신신당부를 했고 당장 이틀 뒤가 결혼식인데. 생화 운송 트럭에 문제가 생겼단다. 어떻게 해줄 거냐니까 꽃집 주인은 흰색 말고 살구색으로 하란다. 얼척은 없었지만 부케 없이 식장에 들어가기도 뭐한지라 일단 그러라고 말을 하고 흰 카라를 가진 꽃집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섰다. 다행히 결혼식장인 구청 앞 꽃집에서 흰 카라 부케를 해줄 수 있단다. 그것도 먼젓번 꽃집보다 30유로가 싸다. 당장 구청 앞 꽃집에 주문을 넣고 다시 루이 르 그헝 가의 꽃집에 전화해 살구색 카라 부케를 취소했다. 꽃집 주인은 남의 결혼식을 망칠 뻔했다는 죄책감이라곤 없이 말했다.


"부케가 살구색이면 왜 안 되는데요? 이거 웨딩 부케도 아니잖아요?"


 주문할 때 웨딩부케니까 시간 맞춰서 잘 좀 해달라고 그리 신신당부를 했는데. 더 말을 섞기도 피곤하다. 주문은 취소했고, 불쾌한 경험이기는 했지만 이런 무책임한 사람의 꽃을 들고 식장에 들어갈 일은 없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 전화를 끊자 구청 앞 꽃집에서 인심 좋게 나눠준 흰 카라 한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화병이 없어 주스병에 꽂은 카라와 마주 하니 도둑 결혼의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알량한 반항심으로 벌인 일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이 결혼이 어릴 적부터 다짐해온 복수의 기준에 들어맞긴 했지만 복수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이 결혼에 아버지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고, 내 인생에 더 이상 아버지에게 내어줄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면서도 마음은 평온했다. 아버지와 내 관계에서 애끓이고 기대를 품는 그런 시기는 오래전에 지나갔다는 사실이 선명히 보였다.


 곧 남편이 될 클로드는 나와 아버지의 오랜 반목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그래도 람, 당신을 길러 준 사람이야. 나는 아버님께 인정받고 싶어.' 라거나 '나를 위해서라도 아버지와 화해할 수 없겠어?'라는 말이 나온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그가 '그런' 착한 남자가 아니어서 한번 더 반했고, 혹시라도 이 사람이 나 몰래 아버지와의 화해 자리를 주선할 걱정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더 믿을 수 있었다. 클로드는 아버지의 손을 놓는 내 결정이 한낱 치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했고, 나는 그가 나의 불화도 존중할 줄 안다는 사실을 신뢰했다. 그래도 내심 각오를 했었다. 신부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겠다는 결정을 공표하는 건 쉽게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클로드의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노여워하신대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흔한 말처럼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결속이니까. 말씀이야 괜찮다고 하셔도 그 속까지 어찌 알겠는가. 은밀히 내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라고 생각하셔도 그건 달게 받아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뭐, 콩가루인 것도 사실이고.


 예상과는 달리 클로드 집안의 어른들은 아버지에 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당신의 아들이, 손자가 우리 집안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며 노여워하실 법도 한데. 클로드는 결혼 전에 '람의 아버지는 람에게 잘 대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분께는 알리지 않고 결혼해요.'라며 한 마디 했고. 그걸로 끝이었다.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분들은 내가 어디서 공부를 했는지, 내 부모님은 인생에서 어떤 성취를 이룬 사람들인지 묻지 않았다. 대화의 초점은 늘 내가 '어떤' 공부를 했고, '어떤' 문화 속에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에 있었다. 찌르는 듯한 감정(鑑定)의 시선이 이 관계에는 없었다-프랑스에는 시월드가 없다는 취지로 쓰는 글은 아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별별 일이 다 있다-. 그건 한 번을 만나도, 여덟 번을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몇 번은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도 없이 결혼식을 치르게 하는 판인데 더 흠 잡힐 일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던 나지만 조금씩 이분들을 알아가면서 '이분들이 적어도 내 가정환경을 흠이라 여기는 일은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지의 영역인 시월드에 품었던 공포감이 빠른 시간 안에 극복된 것은 다 시댁 어른들 덕분이다.

 


 진작 스팀다리미 좀 살 걸. 욕실에 걸어둔 롱 드레스에 일반 다리미로 스팀을 쏴댔지만 주름 펴기에는 진전이 없다. 내일 신을 나와 클로드의 구두를 꺼내놓고, 식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카메라, 코트, 목캔디, 여권, 신분증, 결혼반지, 수정용 화장품까지. 침대에 눕자 클로드가 말했다. 식은 30분도 되지 않아 끝날 거라고. 긴장할 필요 없다고. 그 말을 하는 클로드의 턱에는 이발사가 입힌 상처와 피 묻은 휴지 조각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내일이면 정말 가족이 되는 것이다. 바라던 흰 카라 부케를 손에 쥐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