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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람 Nov 14. 2019

목화와 가죽, 그리고 밀 - ⑤

물의 기념일까지 70년

 실뱅이 와인 한 병을 쾌척했다. 친구들 곁에 앉고 싶은 마음이야 있었지만 처음 뵙는 친지들도 있는 자리라 조심스러웠다. 결국 식사를 다 마친 후에야 나도 친구들 테이블에 합류할 수 있었다. 전해 듣기로는 클로드의 상사가 나의 홍콩 친구에게 자꾸 묻지도 않은 싱가포르 이야기를 했다기에 한숨을 쉬며 대신 사과했지만 친구는 사람도 좋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식사 후에 마신 술값은 친구들이 십시일반하여 치렀다. 와인은 긴장을 하는 바람에 맛이 좋은지 어떤지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런 와중에도 이 식당의 위스키가 맛없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마치 공업용 에탄올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다른 손님들도 위스키 맛에 대해 한 마디씩 한 것을 보면 식당 측에서 보관을 잘못한 모양이었다. 세 시쯤, 만찬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친지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것이 아주 오랜만이라 들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손자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양가 조부모님도, 다른 친지들도 만찬이 끝나자마자 쿨하게 주차 장소를 찾아가셨다. 식사 후에는 젊은 애들끼리 놀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신 걸지도 모르겠다.

 


 한국 결혼과 프랑스 결혼의 다른 점 중 하나로 결혼 선물 문화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아마존에만 접속해도 모든 상품 옆에 '내 결혼 선물 목록에 추가' 버튼이 있고, 다양한 쇼핑몰의 링크를 한 사이트에서 추합하여 결혼 선물 목록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도 존재한다. '새로 시작하는 커플에게 살림 마련해주기'라는 취지는 축의금과 같지만, 이 결혼 선물 리스트를 너무 비싼 선물로만 채워서는 안 되고, 또 주는 사람이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도록 다양한 가격대로 구성해야 한다는 고민이 생기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축의금이 낫다고 생각한다. 눈치게임을 하게 되는 건 축의금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갖은 눈치와 하객들의 반응을 생각해 가며 이 선물은 너무 비싸니까 빼야 되네, 저렴한 선물을 더 추가해야 되네 등의 고민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축의금의 경우는 받을 것과 줄 것이 확실해지는 반면 결혼 선물 문화는 일단 결혼 선물 리스트에서 '찜'을 해서 내가 이 선물을 사겠다는 의사 표현만 하고 나면 언제 줘도 상관이 없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어느 순간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점이 여러모로 모호하다. 또, 청첩장은 줘도 '선물 리스트'는 하객이 우리에게 요청할 때까지 주지 않는 것이 예의란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청첩장에 선물 리스트 QR코드나 링크를 박아서 배포하면 속물이라고 욕을 먹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이 아주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비싼 선물을 준 사람은 클로드의 상사였다(클로드는 피곤함이 서린 목소리로 '그렇게 속을 썩였으니 그 정도는 줘야지'라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은 클로드의 이모님이 만든 자수였다. 두 개의 수틀에 각각 한국과 프랑스 지도가 수놓여 있었는데, 이 두 개의 수틀은 하나의 굵은 실로 이어져 있었다. 또 내 친구가 준 손으로 만든 수첩 역시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죽을 비틀고 꿰매고, 또 원하는 대로 성형하기 위해 구멍을 내는 것이 고된 과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주 고마웠다.


 레스토랑을 나서는 순간부터 클로드가 무척 취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내가 그렇게 체이서(술과 술 사이에 마시는 물, 소다수 등의 음료)도 마셔 주라고 당부를 했는데 주는 대로 벌컥벌컥 마시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클로드는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애초에 본인 결혼식인데 너무 못 마시게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클로드가 반복하는 말이라는 게 전부 '나 너무 행복해'나 '우리 지금 진짜로 결혼하고 있는 거야, 믿어져?'여서 그나마 용서가 되었다-그러나 레스토랑 뒤로는 2차와 3차 뒤풀이가 있었기 때문에 클로드가 술에서 깨는 일은 없었고, 밤까지 똑같은 말에 시달리다 보니 자기 전에는 약간 짜증이 났다-. 원래 취한 사람들의 말버릇이 '나 안 취했어' 아니던가. 클로드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자꾸만 날더러 취했다고 했지만 나는 이미 2차로 간 바에서 1차 구토 위기를 겪은 후로 술은 입에 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클로드보다 더 취했을 확률은 한없이 희박했다.


 2차로 간 바에서 처음으로 주문한 건 진토닉이었다. 지나가던 바 직원이 내게 '잠깐만요, 오늘이 당신 결혼식인데 물이나 마시고 있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물이라고 대답하면 호되게 혼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머뭇거리다 진 토닉이라 대답하니 그녀는 '좋아요, 바로 그거지.' 라며 씩 웃더니 멀어져 갔다. 파리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퉁명스럽고, 또 무성의했다. 내 말은 24시간 동안 이렇게 상냥하고, 친밀하게 농담을 걸어오는 사람들만 만날 확률이 한없이 낮다는 뜻이다. 때문에 나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체 오늘 파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랬지, 우리가 결혼을 했지.


 실뱅이 내게 물어 왔다. '람, 너 목화와 가죽, 밀 기념일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어?'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게 뭐냐는 내 질문에 실뱅은 펜을 빌려 오더니 바 컵받침 뒷면에 표를 그려 가며 설명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맞는 기념일의 이름은 목화(Coton), 두 번째는 가죽(Cuir), 그리고 세 번째가 밀(Froment)이라고. 그 후로 매년 다른 이름이 붙고, 25년째가 은(Argent), 50년째가 금(Or), 60년째가 다이아몬드(Diamant)란다. 매년 다른 이름을 붙이다니, 꽤나 창의력이 필요했겠는걸. 


'물(Eau)의 기념일-100년차-을 맞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아!' 15개의 유리잔이 부딪혔다. 이것이 비혼주의자였던 내 결혼식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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