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꽃다발이 필요한 일이 있어 집에 있는 조화랑 다이소에서 조금 더 구입한 조화를 가지고 꽃다발을 만들었다.
예전에는 저렴한 가격에 지천에 널린 다양하고 아름다운 생화만 있었다.
그러니까 생화라는 표현도 생소했었다.
꽃=생화 공식이 당연시되었다면 오늘날의 생화보다는 꽃 하면 생화에 근접해 가는 조화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같다.
아이를 낳고 신랑 회사 때문에 아는 이 없는 외지에서 지낼 당시 동네의 친절한 사장님의 만 원어치 관상용 꽃꽂이 꽃다발은 오래전 시들어 사라졌지만 나의 마음에 따뜻하고 아름다운 행복감으로 남았다.
매달 만원씩 내가 누리던 소중한 행복은 꽃집이 문을 닫으며 사라졌다.
다양한 생화가 가득했던 꽃집 안은 시간이 갈수록 조화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살아있는 것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가고 있다.
식당만 가도 점원보다는 키오스크가 자리를 하고 있고, 서빙조차도 로봇이 대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 살아 있는 존재들은 생명 보존 구역이라는 곳이 생겨 보존되고, 박물관이나 역사에는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정의들도 새롭게 재정립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이 좋다.
이런 행동조차도 발전된 기기를 이용하면 좀 더 빠르고 편리하게 그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오늘도 연필을 들고 싶어 하는 이유는 연필과 호흡하며 그림을 그리는 행동이 나에게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고 마음에게 건네는 위로 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어느 꽃도 아름답지만 시들기 때문에 내 머릿속 더 아름답고 진하게 인식되는 되는 것 한정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